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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 이옥비 여사 인터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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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하 작성일09-04-13 10:39 조회2,8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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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李陸史 탄생 100주년… 외동딸 沃非씨 단독 인터뷰

아버지를 가장 느끼게 해주는 詩 ‘꽃’을 좋아해

간디처럼 욕심없이 살라고 ‘沃非’라 이름 지어줘

안동=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입력 : 2004.08.01 18:21 16' / 수정 : 2004.08.01 21:54 02'

▲ 이육사의 외동딸 이옥비씨는 아버지에 대한‘긍지’와 제 자신의‘부끄러움’이란 말과 함께 어머니를 통해 들은 기억들을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안동=이재우기자 jw-lee@chosun.com시인 이육사(李陸史·1904~44)는 강직한 성격에 작은 체구였는데, 외동딸 이옥비(李沃非·63)씨도 아담한 모습이었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딸은 내내 “아버지를 빼닮았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감옥을 17 번이나 드나들고, 수인 번호 264를 이름 삼을 만큼 꼿꼿했던 아버지는 엄동설한의 이국(異國) 베이징 감옥에서 광복을 미처 보지 못하고 스러졌지만, 어린 딸은 ‘육사의 딸’로 한평생을 살고 있다. 일본에 있는 한국 공관 관저에서 3년 동안 요리와 꽃꽂이를 맡았던 일을 끝내고 올봄부터 그곳에서 개인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육사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광야에서 부르리라’에 참석하러 잠시 귀국했다. “부담스럽다”며 인터뷰를 사양하는 그녀를 온?‘육사’에 묻혀 있는 경북 안동에서 만났다.  

―‘육사의 딸’로 살아온 육십여 년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긍지도 있지만 부담도 많았어요. 국어 시간에 저에게 아버지 시에 대해 묻는 것도 싫었고… 글을 쓰고 싶어도, 학교에서 백일장 같은 게 열려도 피해 갔어요. 저는 아버지 시(詩) 중 ‘꽃’이 제일 좋았어요. 아버지의 혼이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아버지가 독립투사로서 정말 강인하고 어려운 삶을 사셨구나 생각해요. 어머니가 참 쓸쓸했겠다, 그런 생각도 갖게 되고요. 이번 축제를 보니 기뻐요. 내가 아버님께 덕이 되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 부끄러움도 있고요.”  

―어머니가 홀로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양자(이동박씨)를 들일 때(1946년)만 해도 집안이 좋았지요. 삼촌들 말씀이 ‘형수님은 교육 걱정 하지 말아라. 우리가 다 시켜서 형님 앞으로 세우겠다’고들 하셨지요. 그런데 6·25 때 작은아버님 두 분이 월북하시고, 다섯째 삼촌은 잠시 나갔다 오마 했다가 행방불명됐지요. 그러나 어머니는 가문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고 저한테 매우 엄격하셨어요. 저는 결혼하기 얼마 전까지도 매 맞고 컸어요. 딸이 하나니까 혹시나 삐뚜로 나갈까 봐. 돌아가신 지 이제 20년 가까이 되네요. 하숙도 치셨고…, 밥 못 먹은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가 고생 많으셨어요.”  

―육사는 여섯 형제 간의 우의가 그렇게 좋았다고 하던데요?  

“형 있는 데 아우 있고, 아우 있는 데 형 있다고들 했어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났을 때, 아버지는 동촌 사과 과수원에 놀러 가신다고 했대요. 그런데 4형제가 잡혔지요. 큰아버님(원기), 아버지, 원일, 원조, 두 작은아버님 모두요.”  

―그 여섯 형제 중 육사를 포함해서 세 분이 조선일보 기자를 지내셨지요? 육사는 이활(李活)이라는 필명으로 기사를 썼고, 외숙뻘 되시는 이병각 선생도 조선일보 기자를 했다고 하시데요?  

“어머니도 생전에 그 얘기를 자주 하셨어요. 어머니가 조선일보 애호자예요. 저도 결혼해서 쭉 조선일보만 봤어요. 저쪽(일본)에서 일하면서부터 못 봤지만요.”  

―기자 시절부터 육사는 아주 멋쟁이였다고 합니다. 양복에 나비타이를 늘 하셨다고요?  

“아이보리 색깔이었어요. 내가 그게 기억이 나서 어머니에게 맞냐고 물어보았는데 맞다고 하시데요. 서울 시구문 밖 문화촌(현재의 신당5동) 살 땐데, 지금은 없어진 그 양옥 집에서 술을 많이 드시고 늦게 들어오셔도 이불 밑에다 양복을 깔아야 주무셨대요.”  

 

 

―아버지가 이옥비 여사를 낳을 때는 나이가 드셨을 때죠? 결혼한 지 20년 가까이 되던 해였으니까요.  

“아버지가 열여덟, 어머니가 열여섯에 결혼하셨고 저를 늦게 낳았어요. 두 분이 당최 만나지를 못했으니까요.(웃음)”  

―육사는 일제 때 온몸을 불태워 조국에 바쳤고, 해방 이후엔 여러 정권이 훈장을 추서하기도 했습니다. 경제적 도움은 없었습니까?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아무것도 없었고…, 3·1절에 은수저 한 벌이 고작이던 시절이었지요. 박정희 대통령 후반기에 어머니 앞으로 연금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일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평론가였던 이원조의 친형으로 독립운동가이며 시인이시죠. 아버지를 기리는 기념 사업에 대한 사명감은 안 가지셨는지요?  

“딸이니까 생각을 못했어요. 우리 진성 이씨 가문이 여자들이 나서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사실 내가 컸다면 아버지 관련 자료 같은 것을 많이 보관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몰라서 파손한 것도 많아요. 다락방에서요. 삼촌들이 6·25 전에 아버지 책을 만든다고 사진도 많이 추려갔어요. 그런데 6·25가 났어요. 아버지의 10촌 되는 친척분에게 맡기셨다는데 그 집이 폭격을 맞았어요.”  

―옥비(沃非)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습니까?  

“아버님요. 제 백일날 그 이름을 발표하셨데요. 저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것이에요.”  

―무슨 뜻입니까?  

“기름질 옥, 아닐 비인데, 간디 같은 욕심없는 사람 되라는 뜻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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