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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 잘한 학생들, 이육사와 퇴계를 만나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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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하 작성일09-04-13 11:09 조회3,2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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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 잘한 학생, 이육사와 퇴계를 만나다 - 오마이뉴스

                                                                                   

 

 

내가 일하는 마산제일여자중학교에서는 달마다 시 두 편을 뽑아 전교생이 암송을 하게 한다. 연말엔 '시 경시대회'를 통해 학년별로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 겨울방학 때 하루 코스로 문학 답사를 한다. 이번 문학 답사는 이육사문학관이 있는 안동으로 떠나게 됐는데, 퇴계 이황 선생의 높은 학덕을 기리는 도산서원과 풍산 류씨가 대대로 산 하회마을도 들렀다.

지난 15일 오전 8시에 마산서 출발한 우리 일행이 이육사문학관(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10분께였다. 이육사문학관은 <광야><꽃><교목><청포도><절정> 등 강인하면서도 목가적인 필치로 민족 의지를 노래한 이육사 시인의 시 정신과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04년에 문을 열었다.

앎과 행동이 일치한 시인 이육사의 삶

▲ 이육사 시인의 친필 (시 '바다의 마음' 전부).   ⓒ 김연옥

안동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양심을 끝까지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 이육사(李陸史). 시인이기 이전에 조국과 민족을 뜨겁게 사랑한 독립 운동가였던 그는 경북 안동 사람으로 본이름은 원록(源祿)이다. 아호인 육사(陸史)는 1927년에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신문지에 쌓인 폭탄을 배달 시킨 장진홍 의사 의거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서 1년 7개월 동안 첫 옥고를 치렀을 때 수인 번호 264에서 따온 것이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의 '절정' 전부 

 

폐결핵에 걸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으로 매서운 감방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1944년 1월 16일에 북경 주재 일본영사관 감옥서 마흔 나이로 순국하기까지 그는 열일곱 차례나 투옥되었다. 그러나 인생의 많은 세월을 모진 고문과 수형 생활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광복에 대한 신념을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앎과 삶이 일치했던 시인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이다. 정말이지, 그 시기에 일제에 꺾여 변절한 친일파 문인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 경북 안동시 이육사문학관 내부.   ⓒ 김연옥

안동

 

 

 

 

 

 

▲ 이육사 시인의 따님, 이옥비 여사.   ⓒ 김연옥

안동

 

 

 

 

 

그토록 바라던 조국 광복을 못 보고 가야만 하는 울분 때문인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그는 눈을 감지 못했다고 한다. 어쩌면 헌병대에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될 때 포승에 묶인 채 어렵사리 만져 본, 세 살밖에 안 된 어린 딸의 고사리 같은 손도 눈앞에 아른거렸는지 모른다. 어렴풋이 아이보리 양복을 입은 멋쟁이로 아버지를 기억하는 이옥비(68) 여사가 그때 그 세 살 먹은 어린 딸로 현재 이육사문학관의 상임이사로 근무하고 있다.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이육사문학관에서.   ⓒ 김연옥

안동

 

 

 

 

 

아버지 이육사는 그녀의 백일에 남을 배려하면서 욕심 버리고 살라는 뜻을 담아 기름질 옥(沃)에 아닐 비(非)라는 이름을 손수 지어 주었다 한다. 어린 딸에게 선사한 그 이름에서도 이육사의 곧은 삶이 드러나는 것 같다. 온몸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던 이육사 시인. 그는 진정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의 모습으로 우리 마음속에 오래도록 살아 있으리라. 

 

은은한 선비 정신이 배어 있는 도산서원으로 

 

 

▲ 도산서원으로 걸어가는 마산제일여자중학교 학생들.   ⓒ 김연옥

안동

 

 

 

 

우리는 이육사문학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산서원(사적 제170호,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으로 향했다. 퇴계 이황 선생이 조선 명종 16년(1561)에 도산서당을 지어 유생을 가르치며 학문을 쌓던 곳에 그가 죽은 지 4년이 지난 조선 선조 7년(1574)에 그의 학덕을 기리는 문인(門人)과 유림이 중심이 되어 세운 서원이 도산서원이다. 이듬해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면서 영남 유림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고, 대원군 서원 철폐 당시에도 철폐를 면했다.  

 

퇴계 선생이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도산서당은 그가 4년에 걸쳐 지은 건물로 거처하던 방을 완락재라 하고 마루는 암서헌이라 불렀다. 도산서원의 건축물은 전체적으로 검소하고 간결하게 꾸며져 있는데, 특히 도산서당은 엄동설한에도 은은한 향기를 뿜으며 피어나는 매화를 몹시 사랑했던 그의 선비 정신이 느껴지는 곳이다. 

 

 

▲ (사진 왼쪽) 명필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 현판. (오른쪽) 퇴계 이황이 쓴 광명실 현판.   ⓒ 김연옥

안동

 

 

▲ 도산서원을 둘러보는 학생들. 책을 보관하던 서고인 광명실(光明室)이 보인다. 습해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으로 지어진 광명실은 동서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광명(光明)은 '많은 책이 서광을 비추어 준다'는 뜻을 담고 있다. ⓒ 김연옥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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