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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희 여사 별세-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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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준영 작성일12-08-04 14:05 조회2,9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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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8.03 03:08

애국지사 이병희 여사
옥중 순국한 이육사 유골단지 日 훼손 걱정해 품에 안고 다녀… 방적공장 일하며 항일운동도

의열단원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옥중 순직한 시인 이육사의 시신을 거둔 애국지사 이병희(李丙禧·94) 여사가 2일 오후 2시 35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1918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여사는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자랐다. 조부인 이원식 선생이 동창학교 설립에 참여해 민족교육을 이끌었고, 부친 이경식 선생은 1925년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이 여사는 동덕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세 때인 1933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종연방적(鍾淵紡績)의 여공(女工)으로 근무하며 항일활동에 나섰다. 그는 500여명의 근로자를 이끌고 파업을 주도했다. 그는 생전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 일제가 운영하던 공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여성들만을 직공으로 받았다"면서 "파업에서 보여준 여공들의 저항은 대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파업을 주동한 혐의로 1936년 1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춧가루 고문, 전기 고문 등 큰 고초를 당했다.

icon_img_caption.jpg 생전의 이병희 여사.
1939년 4월 출옥 후 이듬해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해 의열단에 가입, 문서와 무기 등을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았다. 1943년 국내에서 베이징으로 건너온 이육사(李陸史)와 독립운동을 협의하기도 했다. 이 여사와 이육사는 같은 문중(진성 이씨)으로, 먼 친척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 여사는 그 해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돼 베이징 감옥에 구금됐다. 잠시 국내로 잠입했던 이육사도 체포돼 베이징 감옥에 함께 투옥됐다. 이 여사는 1944년 1월 11일 풀려났으나, 이육사는 5일 뒤인 1월 16일 옥중 순국했다. 이 여사는 "형무소 간수로부터 (이)육사가 죽었다고 연락이 와서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으로) 달려갔더니 (이육사의) 코에서 거품과 피가 나와있더라"며 "아무래도 고문으로 죽은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이 여사는 이육사의 시신을 거둬 급히 빌린 돈으로 화장하고 '광야' 등 이육사가 마분지에 쓴 시와 만년필 등 유품을 수습했다. 그는 일제가 유골을 훼손할까 봐 이육사의 유족에게 전달할 때까지 한동안 유골 단지를 품에 안고 다녔다고 한다.

이 여사는 해방 이후엔 사회주의계열 여성 독립운동가로 분류돼 스스로 독립운동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정부는 1996년 이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은 아들 조영철씨, 빈소 서울 중앙보훈병원, 발인은 4일 오전 7시. (02)2225-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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