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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문학관 살림 도맡은 유일한 혈육 옥비씨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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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하 작성일09-03-01 09:53 조회2,5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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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문학관 살림 도맡은 유일한 혈육 옥비씨 [중앙일보]

“아버지는 아이보리색 옷 즐겨 입은 멋쟁이”
“바지 주름 빳빳하게 잡으려 늘 요 밑에 깔아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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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비씨가 문학관 안에 있는 아버지의 흉상 옆에서 포즈를 취했다. [프리랜서 공정식]
“나이 들어 아버님 곁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1904∼44, 본명 이원록)의 유일한 혈육 이옥비(67) 여사가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이육사문학관’의 안주인이 됐다. 이씨는 안동시의 권유로 올해 3월부터 문학관에서 일본어 통역 등을 하다가 이달 들어 아예 거처를 그리로 옮겼다. 문학관 뒤쪽에 복원된 시인의 생가인 육우당이 새 보금자리다.

육우당은 앞뒤 두 채의 한옥으로, 뒤채는 이 여사가 기거하고 앞채는 문학관의 사무국 공간으로 쓰고 있다. 안동시는 육사 탄생 100주년인 2004년 문학관을 개관해 직영해 오다 이달 들어 이육사추모사업회에 운영권을 넘겼다.

최근 육우당을 찾았을 때 이 여사는 한복 차림에 차 대신 커피를 내왔다. 경기도 용인 집에서 차와 가재 도구 등 부친 짐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며 양해를 구했다.

“아버님의 고향인 안동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한복도 그렇고요.”

그는 대구에서 학교에 다녔고, 서울 쪽에서 계속 살았다. 행사 때만 안동을 찾았다.

시인은 이 여사가 세 살 때 중국 베이징 주재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1944년의 일이다. 그런데도 살아생전 아버지의 옷차림은 용케 기억에 남아 있다. 아버지가 아이보리색 옷을 입은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생전에 “맞다”라며 “그게 기억나느냐”라고 놀라워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통해 들은 아버지는 멋쟁이였다고 한다. 바지의 주름이 빳빳하게 서도록 항상 요 밑에 바지를 깔았다. 흰 칼러는 하나씩 여유분을 갖고 다녔다.

이 여사는 본래 오빠와 언니가 있었지만 모두 첫 돌 전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셋째가 옥비(沃非)씨다. ‘욕심이 없어라’란 뜻의 이 이름은 백일 날 아버지가 직접 지었다. 간디처럼 욕심 없이 살라는 뜻을 담았다. 아버지가 딸에게 남긴 정신적인 유산이다.

아버지를 회상하던 이 여사는 마지막 모습을 전하면서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당시 감옥에서 제 아버님의 시신을 수습한 이병희(92) 선생을 얼마 전 만났습니다. 아버님은 눈을 감지 못 한 채 숨을 거두셨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이제 조선은 저희에게 맡기시라’라고 말하며 눈을 감겨 드리자 아버님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고 해요. 그만큼 삶이 고단하셨는가 봅니다.”

이 여사는 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어머니와 가족들 품에서 “아버지를 빼닮았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러다가 대학을 마치고 결혼한 뒤 주부로 살아왔다.

두 아들을 키우며 꽃꽂이와 궁중요리를 하고 가르쳤다. 99년 평소 건강하던 남편이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이 여사는 일본으로 훌쩍 떠났다. 때마침 일본 니가타의 한국 총영사관이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열흘 만에 내린 결정이었다. 모든 걸 잊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머문 게 5년6개월이나 됐다.

묘한 인연이었다. 대학 시절 일본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했더니 뒤늦게 이를 안 어머니가 화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원수처럼 싫어한 나라가 일본이었다. 그 나라를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몰랐던 일본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됐다.

“글 쓰기는 마음은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피해 갔어요. 웬만큼 해서 되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두 아들도 글과는 인연이 없다고 했다. 이 여사는 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이 아버지 시를 외워 보라고 했을 때 당황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때는 육사의 딸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불편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없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아버지가 나무꾼이라도 살아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육사문학관은 개관 이래 10만여 명이 찾았다. 학생과 문인이 많이 찾는다. 그는 요즘 문학관에서 같이 사진을 찍자는 요청을 많이 듣는다. 찾아오는 문인들과 이야기도 나눈다. 그러면 다시 가까이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느낌이다.

안동=송의호 기자, 사진=프리랜서 공정식

◆이육사=경북 안동 출신의 시인으로 본명은 원록, 또는 원삼이다. 활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육사((陸史)는 1927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의 대구은행 폭파사건에 연루돼 3년간 옥고를 치를 때의 수인번호 64번에서 따온 호다. 출옥 뒤 베이징대 사회학과에 입학해 루쉰 등 중국의 인물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33년 귀국해 ‘청포도’‘절정’‘광야’ 등을 발표하며 문학활동과 독립운동을 병행했다. 43년 일제에 의해 체포, 베이징으로 압송됐다가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44년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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