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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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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홍 의거’ 연루
1년 7개월의 수감생활

 

이육사가 1927년 중국 베이징을 다녀온 후 독립활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을 때, 대구 전체를 뒤흔든 거사가 발생하였다. '장진홍 의거'가 바로 그것이다. 1927년 10월 18일 11시 50분에 조선은행 대구지점(중앙로)으로 신문지에 쌓인 폭탄이 배달되었다. 이것을 확인하던 직원이 놀라서 길거리에 내놓았을 때 폭탄이 터진 것이다. 

 
4형제(원기, 육사, 원일, 원조)
이 사건에서 일경은 장진홍이란 인물은 물론 단서조차 잡지 못하자,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을 잡아들여 고문으로 거짓 진범을 조작해 법정에 세웠다. 이 과정에서 육사를 비롯하여 원기·원일·원조 등 4형제, 그리고 이정기도 함께 검거되었고, 원기를 제외한 나머지 육사 형제들은 미결수 상태로 1년 반을 넘겼다.
 
혹독한 고문

 

그런데 애당초 육사를 비롯한 인물들이 장진홍 의거에 직접 연루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은 거사 후 1년 4개월이 지난 1929년 2월 14일에 주인공 장진홍이 일본 오사카에서 체포되면서 드러났다.
그런데도 이들은 장진홍에 대한 예심이 끝나던 그해 5월까지 장기간 미결수

생활을 하고, 12월에 가서야 무혐의로 종결되었다. 그들이 이 거사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바로 그들이 석방된 판결문 내용, 즉 `(검찰이) 공판에 회부한 범죄의 혐의가 없다'는 데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결국 혹독한 고문으로 붙인 죄목에 억지로 꾸며낸 시나리오로 육사 형제들은 너무나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동안 육사 형제들이 장진홍 의거에 참여했다고 알려지거나 기록된 것은 잘못된 일이다

장진홍은 1930년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일제에 의해 욕된 죽음을 당하기보다 자결을 선택한다. 장진홍은 그해 7월 31일 자결 순국한다.

 
대구격문사건
대구경찰서 2개월 옥고
육사는 이른바 '대구격문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체포된다.
육사의 형 원기가 이영우에게 1931년 1월에 육사와 원일이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는 소식과 도움을 요청한 편지
이 거사는 1929년 11월에 터진 광주학생항일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과정에서 대구에서도 1930년 1월 중순에 동맹휴학이 시도되었고, 이어서 6월에도 동맹휴학이 단행되었다. 그러다가 10월에 대구농림학교가 동맹휴학했고, 1931년 1월에는 대구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동조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러한 과정에 1930년 11월에 대구 거리에 일본을 배척하는 내용의 격문이 전봇대에 나붙고 거리에 뿌려지는 거사가 일어났다.
 
무장투쟁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생
육사는 대구 격문사건으로 2개월간 옥고를 겪은 후 1931년에 다시 중국에 가서 김두봉과 만나고, 33년 국내로 잠입하기 위해 상해에 들렀을 때, 그는 중국의 문호요 사상가인 루쉰(魯迅)과도 만났다. 이 해에 의열단에서 운영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하게 된다. 그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밀양 출신인 윤세주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독립운동단체 의열단
윤세주를 말하려면 김원봉과 연관되지 않을 수 없고 김원봉과 윤세주를 말하려면, 그리고 이육사의 민족해방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열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의열단은 널리 알려진 것과 같이 1919년 11월에 중국 길림성의 파호문 밖에서 김원봉·윤세주 등 13명이 모여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이다. 육사와 그의 처남 안병철을 포함한 20명의 1기생들은 1932년 10월 20일에 입교식을 가졌다. 나머지 6명은 뒤에 별도로 입교하여 1기생은 모두 26명이었다. 이 학교의 교관은 20여명이었고, 그중 중국인이 3명이었다.
그가 의열단에서 설립한 군사간부학교를 졸업하긴 했지만 의열단에는 결코 가입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군사학 교육-탄약, 폭탄, 뇌관...
이수기간은 1932년 10월 20일부터 1933년 4월 20일까지 6개월이었고, 입교생들은 재학중에 학원(學員)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국민군 보통병사의 상위로서 견습사관의 대우를 받고 졸업 2∼3개월 후에는 소위로 임관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저녁 9시에 취침하기까지 교양과목과 군사학을 교육받았다. 교양과목으로는 정치학(교관:한모), 경제학(교관: 왕현지), 사회학과 조직방법(교관:김정우), 철학(김원봉)을 배웠고 그외 군사학, 통신법, 선전법, 연락법 등을 비롯하여 탄약, 폭탄, 도화선, 뇌관 등 제조법, 그리고 투척법, 피신법, 변장법, 서류은닉법, 삐라살포법, 암살법, 무기운반법, 철로폭파법, 열차운전법 등을 교습받았다.
1기생으로 졸업-공연대본(지하실)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 1기생들의 졸업식은 1933년 4월 23일 학교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졸업식에는 교장 김원봉과, 남경중국일보 사장인 캉저(康澤)과 비밀공작법을 가르친 시에중용(協中庸) 등이 참석했다. 식이 끝난 후에는 연극이 공연되었는데, 이 공연에서 육사는 <지하실>이라는 대본을 썼고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졸업후 육사는 국내의 노동자 농민에게 혁명의식을 고취하는 것과 2기생 모집을 위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극비리에 가입, 민족독립의식
그는 귀국 후 언론활동을 통해서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의열단은 제1기생들의 재학 중에 교관이나 입학 때의 소개자를 통해 그들의 혁명의식을 확인한 후 극비밀리에 입단을 권유하고 이에 응한 사람에게는 가입맹서를 하게 했다. 제1기 졸업생들의 중요한 사명이 의열단 지부를 조직하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면 혁명간부학교 졸업생들은 모두 의열단에 가입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제1기생들이 학교를 졸업한 약 2개월 후인 1933년 6월 말, 의열단 전체회의가 남경의 혁명간부학교에서 개최되었고, 여기에 참가한 제1기 졸업생 단원 18명의 명단이 있으나 그 속에 이활의 이름은 없다.
 
서대문 감옥
요주의 인물로 수배중
중국에서 군사간부로 육성된 목적에 충실하기 위하여 국내 공작원으로서 부여받은 사명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 1934년 3월 22일 경찰에 체포된다. 일본 경찰은 육사가 만주로 사라진 1932년 4월 이후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일본경찰의 기록에 "1932년 4월에 다시 만주로 갔으나 그 뒤에 소재불명이어서 요주의 인물로 수배중에 있었음"이라고 적혀 있다. 6월 23일 기소유예로 풀려난다.


1934년 6월 20일자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작성된 신원카드 사진
1934년 7월 안동경찰서 보고내용
"배일사상, 민족자결 ,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었음 .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당시 육사가 체포된 곳은 광화문 앞 본정에 자리한 경기도경찰부 경성본청이었다. 이 때 작성된 신원카드가 남아 있어, 이를 통해 그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신분은 상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키는 5척4촌5분인데 1척을 30.3cm 로 계산하면 165cm 이므로 당시의 보통 키에 해당한다.
◀ 1934년 6월 20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작성된 신원카드
 
마지막 길


무기반입을 위한 계획
그가 베이징에서 귀국할 때 무기를 반입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계획을 세운데에는 1940년대에 들어 국내에서는 독립군적인 조직들이 나타나고 있었던 점과 걸음을 같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빠 갔다 오마”
1943년 7월에 그는 모친과 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 고향마을인 원촌과 안동풍산에서 일박하고 상경한 뒤, 늦가을에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된다. 부인 안일양은 7월에 동대문 경찰서에서 마지막으로 육사를 보았다고 전한다. 20여일동안 구금생활을 치르다가 "딸 옥비에게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딸의 볼을 얼굴에 대고, 손을 꼭 쥐고는 '아빠 갔다 오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신을 인수해 가라”
20여일 후 베이징으로 끌려갔다. 육사의 마지막 길이었다. 육사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육사와 같은 마을 출신이자 독립운동 활동을 하던 친척 이병희(여)가 육사의 마지막을 정확하게 증언해 주었다. 육사가 사망했으니 시신을 인수해가라는 연락을 듣고 이병희는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으로 가서 관을 인수하고, 급히 빌린 돈으로 화장을 치렀다. 그 유골이 든 상자를 이귀례라는 친구집에 두었다. 순국 후 9일 지나 1944년 1월 25일에 원창에게 넘겨졌다. 유해는 국내로 옮겨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 그의 고향마을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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