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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오행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되리라고 배워 온 것이 세 살 때부터 버릇이었나이다. 그렇다고 이 버릇을 팔십까지 지킨다고는 아예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야 지금 내 눈앞에 얼마나 기쁘고 훌륭하고 착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면서 그대로 자꾸만 살아가는 판이니 어쩌면 눈이 아슬아슬하고 몸서리나고 악한 일인들 없다고 하겠습니까? 차라리 그것은 그 악한 맛에 또는 빛에 매력을 느끼고 도취되어 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된다면 그 또한 어머님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은 방편이라고 하오리까?

딴은 내 일찍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마음먹어 본 열 다섯 애기시절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도(道)를 다 배웠다고 스스로 들떠서 남의 입으로부터 '교동(驕童)'이란 기롱(譏弄)까지도 면치 못하였건마는 어쩐지 이 시절이 되면 마음 한편이 허전하고 무엇이 모자라는 것만 같아 발길은 저절로 내 동리 강가로만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나 그곳에 무슨 약속한 사람이라도 있었구나 하고 생각을 하면 그것은 여간 잘못된 생각이 아닙니다. 본래 내 동리란 곳은 겨우 한 백여 호나 될락 말락한 곳, 모두가 내 집안이 대대로 지켜 온 이 땅에는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닌 무서운 규모가 우리들을 키워 주었습니다.

지금 내가 생각해 보아도 우습기도 하나 그때쯤은 으레히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내 동리 동편에 왕모성(王母城)이라고 고려 공민왕이 그 모후(母后)를 뫼시고 몽진(蒙塵)하신 옛 성터로서 아직도 성지(城址)가 있지마는 대개 우리 동리에 해가 뜰 때는 이 성 위에서 뜨는 것이었고, 해가 지는 곳은 쌍봉(雙峯)이라는 전혀 수정암으로 된 두봉이 있어서 그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해가 지면 우리가 자랄 때는 집안 어른을 뵈러 가도 떳떳이 '등롱(燈籠)'에 황촉불을 켜서 용(龍)이나 분이(粉伊)들을 들리고 다닌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홀로 강가에 나갔을 때는 그곳에는 어화(漁火)조차 사라진 것을 보아도 내가 만날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변명할 것도 없거니와 해가 떠서 넘어간 그 바로 밑에는 낙동강이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낙동강이라면 모두들 오── 네 고장은 그 무서운 홍수로 이름난 거기냐 하고 경멸하면 그것은 낙동강을 모르는 말이로소이다. 낙동강이라면 태백산 속에도 황지천천(黃地穿泉)에서 멍석말이처럼 솟아나는 그 샘물의 이상을 모른대도 고이할 바는 아니오나 김해, 구포까지 칠백 리를 흘러가는 동안에 이 골물이 졸졸 저 골 물이 콸콸 열에 열 두골 물이 한 데로 합수쳐 천방져 지방져 저 건너 병풍석 꽝꽝 마주쳐 흐르다가 그 위에 여름 장마가 지면 하류에 큰물이 나나, 그에 따르는 폐단쯤은 있을 법도 한 일이오매 문죄를 한다면 여름 장마를 할 일이지 애꿎은 낙동강이 무슨 죄오리까? 하지만 이것도 죄라면 나는 죄와 함께 자라난 것이오리까. 그래서 눈물지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 또한 내 회오(悔悟)할 바 없으랴. 하지만 내 고장이란 낙동강가에는 그 하이얀 조각돌이 일면으로 깔리고, 그곳에서 나는 홀로 앉아 내일 아침 화단에 갖다 놓을 차디찬 괴석들을 주으면서 그 강물 소리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봄날 새벽에 유수를 섞어서 쩡쩡 소리를 내며 흐르는 소리가 청렬한 품품 좋고 여름 큰물이 내릴 때 왕양(汪洋)한 기상도 그럴 듯하지만 무엇이 어떻다해도 하늘보다 푸른 물이 심연을 지날 때는 빙빙 맴을 돌고 여울을 지나자면 소낙비를 모는 소리가 나고 다시 경사가 낮은 곳을 지날 때는 서늘한 가을로부터 내 옷깃을 날리고 저 아래로 내려가면서는 큰 바위를 때려 천병만마를 달리는 형세로 자꾸만 갔습니다. 흘러 흘러서……. 그때 나는 그 물소리를 따라 어디든지 가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어 동해를 건넜고, 어느 사이<플루타크 영웅전>도 읽고, <시저>나 <나폴레옹>을 다 읽은 때는 모두 가을이었습니다마는 눈물이 무엇입니까, 얼마 안 있어 국화가 만발한 화단도 나는 잃었고 내 요람도 고목에 걸린 거미줄처럼 날려 보냈나이다.

그리고 나는 지주(蜘蛛:거미)가 되었나이다. 누가 지주를 천재라고 하였나이까? 그놈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동안 그 작은 날파리나 부드러운 나비 나래를 말아 올리고도 모른척하고 창공을 쳐다보는 것은 위선자입니다. 그놈을 제법 황혼의 세스토프라는 말은 더욱 빈말입니다. 그 주제에 사색을 통일하려는 듯한 얼굴은 멀쩡한 배덕자입니다. 두고 보시오. 그놈은 제 들어갈 구멍을 보살피는 게 아마 바람결을 꺼리는 겝니다. 하늘이 푸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느 암혈(岩穴)에라도 들어가면 한겨울 동안을 두고 무엇을 생각하리라고 믿어집니까? 거미라도 방안에 사는 거미들은 아침 일찌거니 기어나오면 그 집에서는 그날 반가운 소식을 듣는다고 기뻐한 것은 우리 고장의 풍속이었나이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께서는 우리 형제들 가운데 누가 여행을 했을 때나 객지에 있을 때면 으레 이 아침 거미가 기어 나오기를 기다렸다고 하신 말씀을 우리가 제법 장성한 때에 알았습니다마는, 지금은 우리 집 안사랑에 아침 거미가 기어나온다 해도 나의 늙으신 어머니께서는 당연히 믿지 않으셔야 옳을 것은 아시면서도 그래도 마음 한편에 행여나 어느 자식이 편지를 부칠는지 하고 바라실 것을 아는 나는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피워 무는 버릇이 늘었나이다. 담배는 이전에는 궐련을 피우는 것이 버릇이었으나, 요즘은 일을 할 때 반드시 손에 빼드는 것이 성가시고 해서 어느 날 길가에서 사 가지고 온 골통대를 피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피워 물면 그놈의 연기가 아주 천간산(淺間山)의 분연(噴煙)에다 비한단 말이겠습니까? 그야 나에게는 '폼베이 최후의 날'같이도 생각이 되옵니다.

그것은 과연 그러하오리다. 나에게는 진정코 최후를 맞이할 세계가 머리의 한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오르는 순간 나는 얼마나 기쁘고 몸이 가벼우리까? 그러나 이 웃음의 표정은 여기에 다 쓰지는 않겠나이다. 다만 나 혼자 옅은 미소를 하였다고 생각을 해두지요, 그러나 이럴 때는 벌써 나 자신은 로마에 불을 지르고 가만히 앉아서 그 타오르는 광경을 보는 폭군 네로인지도 모릅니다. 그 거미줄같이 정교한 시가(市街)! 대리석 원주! 극장! 또는 벽화! 이 모든 것들이 타오르는 것을 보는 네로의 마음은 얼마나 통쾌하오리까? 로마가 일어난 것은 하루아침 일이 아니라, 한 말을 들으면 망하기 위하여 헐고 부릇나고 한 로마에 불을 지르고 그 찬란한 문화를 검은 오동 마차에 실어 장지(葬地)로 보내면서 호곡하는 인민들을 보는 네로! 초가삼간이 다 타도 그놈 빈대 죽는 맛이 좋다고 하는 사람의 마음과 같이 통쾌하지 않았을까!

지금 내 머리 속에 타고 있는 내 집은 그 속에 은촛대도 있고 훌륭한 현액(懸額)도 있기는 하나 너무도 고가(古家)라 빈대가 많기로 유명한 집이었나이다.

이 집은 그나마 한쪽이 기울어서 어느 때 어떻게 쓰러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우리 집을 쳐들어오면 나는 그것을 모스코같이 불을 지를 집이어늘, 그놈의 빈대란 흡혈귀를 전멸한다면 나는 내 집에 불을 싸지르고 로마를 태워 버린 네로가 되오리다.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그 골통대의 담배가 모두 싸늘한 재로 화하고, 찬바람이 옷소매에 기어들 때 나는 거리로 나옵니다. 거리에는 사람들도 한산하여지고 차차로 가로등이 켜지는 까닭입니다. 까짓껏 가로등이라면 전기회사에서 하는 장난에 틀림이 없으나 그것은 살아 있는 거리의 비애입니다. 그 내력을 들어보시오. 그도 벌써 5년 전 옛일입니다. C라는 젊은 친구와 내가 바로 이 시절에 이 등불이 켜질 때면 이 거리를 걸어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에 그를 시골로 보낸 것도 이 거리의 등불 밑이 아니겠습니까. 그 후 몇 달을 지나고 나에게 온 그의 편지에서 일 절을 써 보겠나이다.

- 내려와서 한 달 동안은 집안을 망친 놈이란 죄명을 쓰고 하루 한시도 지낼 수가 없었소. 우리 구사(廐舍)에 매여 있는 종모우(種牡牛)와 같이 아무리 생각해도 살수는 없었소. 그래서 나는 선영(先塋)이 있는 산중에 들어온 것이오. 이 산중에는 나무가 많아서 이것을 채벌하면 나는 지금 이곳에서 숯을 굽겠소. 그러나 내가 숯을 굽는다고 돈을 번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소. 다만 내 홀로 이 산속에서 숯가마에 불을 싸지르고 그놈이 타오르는 것을 보기만 해도 이때까지 아무에게나 호소할 곳 없던 내 가슴속 앙앙한 울분이 한 반은 풀리는 듯하고, 복수를 한 때와도 같고 - 하던 친구가 마침내 그 아내와 사이가 둥글지 못하고 다시 서울로 와서 그 숯가마에 불을 지르고 타오를 때 통쾌하던 얘기를 몇 번이나 이 거리를 다니며 되풀이를 할 때면 해 뜻 없는 가을 날씨에 거리의 등불이 켜지곤 하였건만 지금엔 그조차 불에 살아서 그 조그마한 오동합(梧桐盒)에 뼈만 담아 고산(故山)으로 보낸 것도 3년이 넘고 나 홀로 이 거리를 가면서 가을 바람에 옷깃을 날리건마는 그래도 눈물지지 않는 건 장자(長者)의 풍토일까?

거리의 상공에는 별이 빛나는 밤이었소. 밤이라도 캄캄한 한밤중은 별들의 낱수가 훨씬 더 많이 보이는 것이지마는 우리 서울 하늘에는 더구나 가을밤 서울 하늘에는 너무나 깨끗이 갠 하늘이라 별조차 낱수가 그다지 많지는 않아서 하이네가 본다면 황금 사북을 흩어 놓은 듯하다고 감탄할는지도 모르겠소. 그러나 하이네는 하이네고 나는 나이지 사람마다 제대로 한 가지의 긍지가 있는 것을 왜 우리 서울의 가을 하늘 밑에서 울거나 웃거나, 슬픈 일이 있거나 기쁜 일이 있거나 우리는 모두 이 하늘만을 쳐다보고 부르짖은 것이 아니겠소. 그 모든 것이 내 지나간 시절의 자랑이었으니 이제 새삼스레 뉘우칠 바도 없소.

하기야 서울도 예전 같으면 아라비아의 전설에나 나올 듯한 도시이었기에 해외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면 서울의 자랑을 무척도 하였겠지마는 오늘의 서울은 아주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는 것이오. 거리를 나서면 어느 집이라도 으레 지금(地金)을 판다거나 산다거나 금광을 어쩐다는 간판들이 쭉 내리 붙어서 이것은 세계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우리의 서울과 알래스카의 위치를 의심쩍게 할는지 모르겠소. 그래서 사실인즉 내 마음에 간직해 온 서울의 자랑도 이제는 그 밑천을 잃어버린 셈이오. 그러나 아직 얼마 동안 저 하늘만은 잃어버릴 염려는 없는 것이오. 그러기에 나는 서울의 하늘을 사랑하고 그 밑에서 일어났다는 사라지는 일들을 모두 기억해 두었다가는 때로는 그 기억에 먼지를 덮어두는 일이 있소.

앞날을 생각하는 것은 그 일이 대수롭지 않아도 언젠가 마음 한구석에 바라는 것이나 있겠지마는 무엇 사람의 마음을 쓸쓸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라오. 누구나 20이란 시절엔 가을밤 깊도록 금서(禁書)를 읽던 밤이 있으리다. 그러나 나는 그때 무슨 까닭에 야금술(冶金術)에 관한 서적을 읽어 본 일이 있었나이다.

그때 나를 담당한 Y교수는 동경에서 문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그의 작품에 <안작>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란 건 글씨의 안품을 능구렁이 같은 상인들이 시골 놈팡이 졸부를 붙들어 놓고 능청맞게 팔아먹는 것인데, 그 독후감을 이야기했더니 그는 좋아라고 나를 붙들고 자기의 의견을 말한 뒤 고도(古都)의 가을 바람이 한층 낙막(落寞)한 자금성(紫金城)을 끼고 돌면서 고서와 골동품에 대한 이야기와 역대 중국의 비명(碑銘)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준 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그의 연구실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나이다. 그 뒤에도 나는 Y교수를 만나면 내가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사실은 알고 싶지도 않은 고고학에 관한 이야기까지도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높은 지식은 내가 애써 배우려하지 않은 것이라 지금에 기억되지 않는 것은 죄 될 바도 없지마는 그가 문학을 닦았고 문학을 가르치면서도 야금학에 깊은 조예(造詣)가 있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야금학에 통한 이야기는 나에게 들려주지 않았으므로 일부러 묻는 것도 쑥스럽고 해서 자제하던 차에 나와 한 반에 있는 B에게 물어보았더니 B는 한참 말이 없이 빙그레 웃다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Y교수는 야금학을 학술상으로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집에는 대장간보다도 더 복잡한 연장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해서 무엇 하는거냐고 물으면 안금을 만든다고 말을 하고는 쓸쓸히 웃기에, 안금은 만들어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면 돼지 목에 진주를 걸어 주는 것을 네가 아느냐고 하고는 화를 버럭 내기에,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겁도 나고 해서 그만 아무 말도 못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가을부터 여가만 있으면 턱없이 야금학(冶金學)에 관한 책을 보는 버릇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애달픈 일로는 속담에 칼은 10년을 갈면 바늘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바늘로 문구멍을 뚫어 놓았던들 그놈 코끼리란 놈이 내 방으로 기어 들어오는 것을 보기나 할 게 아닙니까? 사람이 야금에 관한 책을 봐서 안금을 만들어 보지 못하고, 칼을 갈아서 바늘을 만들지 못한 내 생애? 시골 촌 접장을 불러 물으면 "서검공허40년(書劍空虛四十年)" 운운하고 풍자를 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을에도 저녁으로 책사(서점)에 돌아다니면서 묵은 책을 뒤져보고 했으나 어쩐지 그 Y교수의 애교도 없는 큰 얼굴이 앞을 가려서 종시 책도 보지 못하고, 다듬이 소리만 요란한 동리 어구를 돌아오면 진주들은 먼 바다 속에서 꿈을 꾸는지 별들이 내 머리 위에서 그것을 지킬 때 나는 침실로 들어가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별들을 쳐다보고서 잠이 들면 나는 꿈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것은 어느 해 가을이었나이다. 그 해 가을 우리 동리에는 무슨 큰 변이 났다고 해서 모두들 산중으로 자기 집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나 또는 농장(農庄)이 있는 곳으로 피난을 가는 것이었고, 그때 나도 업혀서 피난을 갔었는데 그것이 아마 지금 생각하면 평생에 처음 되는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피난가는 길이었던 만큼 포스랍지는(풍족하지는) 못하였고 나의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것이라야 우리가 간 그 집 뒤에 감나무가 있어서 감이 조롱조롱 열리고 첫서리를 기다리느라고 탐스럽게 붉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다 시골에 있어 본 사람이면 한 번씩은 경험한 일이리다마는 요즘 서리가 오려고 하면 처마끝으로 왕벌들이 날아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벌들 중에도 어떤 놈은 높다랗게 날아와서는 감나무 제일 높은 가지 끝에 병든 잎사귀를 그 예리한 바늘 끝으로 꼭꼭 찔러 보고는 멀리 금선(琴線)을 죽 그으면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그 벌을 잡아 달라고 나를 업고 다니던 돌이를 조르고 악을 악을 쓰고 울기만 하면 그래도 악이 풀리고 속이 시원하여졌으며, 어른들이 나를 달래려고 온갖 유밀과(油蜜果)가 나의 미끼로 나왔겠지마는, 지금이야 울 수도 없는 악을 쓸 곳도 없고 하니 그저 꿈속에나 소-로-의 삼림 속을 헤매는 것이었나이다.

그러던 것이 일전 내가 집을 얻은 곳은 산 위의 조그마한, 잘 말하면 양관(洋館)이 온통 소나무 숲 속에 싸여 있는 곳입니다. 집을 찾아오던 그날 석양에 어디서 날아온 놈인지 굵다란 왕벌이란 놈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윙 소리를 내면서 처마 끝에 왔다가는 바로 정문 앞에 있는 활엽수를 한번 휙 돌아서 잎사귀 하나를 애처롭게 건드려 놓고는 기다란 줄을 그리며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소 과분한 집인 것을 알면서도 그 집에 있기로 하였습니다. 그래 들어놓고 보니, 전후좌우가 모두 삼림이고 고요하기 짝이 없으며, 바람이 불어 솔솔이 파도가 이는 듯하고 그러면 집안은 더욱 고요해지는 것입니다. 그나마 바람뿐이오리까?

지난 밤에 사 말고 비가 오는 것이고 빗소리 솔잎 사이를 새서 듣는 것이란 무슨 바늘과 같이 마음속을 기어드는 것이었나이다. 괴테가 말한 산상의 정적(靜寂)이란 이런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베개 속을 들어가면 어느덧 바람이 비조차 몰고 가고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벌레들이 제각기 딴 해음(諧音)으로 읊조리면 벌써 밤도 무던히 깊어졌는가 봐. 멀리서 달려가며 나던 포오키 차의 궤도를 가는 소음도 다 끊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아침이 오고 나는 거리로 나오기를 마치 먼길을 떠나듯 합니다. 그리고 해가 져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행길에서 내 집이 8백 미터의 거리밖에는 되지 않고 걸어 15분에 닿을 수 있다 셈쳐도 그 동안이 그다지 가까운 것도 아니고 까마득한 것만은 그래도 나에게는 그것이 멀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다 같은 동안이라도 활엽수가 울창할 때는 그곳이 가깝다가도 낙엽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을 때는 훨씬 더 멀어지는 것이 보통이고 서운한 마음도 생기련만 항상 푸를 수 있는 소나무가 빽빽이 둘러선 내 집은 정말 그렇지 않다손치더라도 별달리 나에게 가까운 것이 한 개의 방편도 되옵니다. 그야 만산홍엽(滿山紅葉)이 잦아지는 것도 곱기야 하다 한들 어느 때나 푸를 수만 있는 소나무도 영원의 고집쟁이를 흉볼 리는 없으리라. 오렌지와 같은 열매가 없다는 게나 야래향(夜來香)같은 꽃이 없다고 해도 내 마음의 기쁨도 맛볼 때가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되풀이하며 걷는 15분 동안에 내 손 한쪽은 포켓 속에서 쇳대를 만지작거려 봅니다. 이놈만 있으면 나는 무슨 큰 비밀을 찾아낼 듯한 믿음이 있는 까닭이었나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는 그 쇳대를 내 집에 있는 동무에게 맡겼나이다. 그것은 내 지금에 별다른 믿음을 갖지 못한다 해도 소나무가 우거진 그 속에서 가을 기운을 마셔 보고 머리 속을 서늘케만 하면 내 염원을 다 채워 줄 수가 있는 까닭입니다. 행여 어느 밤에 이 삼림의 요정들이 찾아와서 나에게 놀기를 청하면 나는 즐겨서 그들에게 얘기를 할 것이고, 그들은 내 얘기를 슬픈 꿈같이 듣고는 새벽이 되면 별과 함께 하나씩 하나씩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하는 동안에 사실은 나의 꿈도 깨어지고 내 사랑하는 푸른 지평선도 잃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잃어진 지평선이란 게야 무엇 상글리라와 같은 허망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금년 봄 일입니다. 내가 남방의 어느 화전민 부락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해발 3천 피트, 태양과 매우 가까운 곳이었나이다. 돌과 돌이 쌓여 오르고 바위와 바위가 거듭 놓여 칡과 등(藤)이 겨우 얽어매 놓은 그 위에 이 재에도 한 집, 저 등에도 한 집 건너다 보고 부르던 대답할 곳을 찾아가려면 그 긴 골짜기를 내려가서 다시 10리나 올라가는 길! 그곳에서 차조, 메조를 짓고 감자를 심고, 묏돌과 싸워 가며 살아가는 생명이 바람 속에 흔들리는 등불과 같던 것을 나는 다시 회억(回憶)해 보는 것입니다.

지구가 생겨서 몇 억만 년 사이 모진 풍상에 겨우 풍화작용으로 모래가 되고 그 위에 푸른 매태와 이끼가 덮인 이 척토(瘠土)에 '생명의 기원'의 원형 같은 그곳의 노주민(老注民)들과 한데 살면서 태양과 친히 회화를 하는 것으로 심심풀이를 하고 살아가며 온갖 고독이나 비애를 맛볼지라도, '시 한 편'만 부끄럽지 않게 쓰면 될 것을 그래 이것이 무엇이겠소. 날에 날마다 거리를 나가는 내 눈동자는 사람들의 얼굴을 향하여 고양이 눈깔처럼 하루에 몇 번씩 변해지는 것이오. 아무리 거슬리는 꼴을 보아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지 않는다는 것이 군자의 도량이라고 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오. 그 군자란 말속에 얼마나한 무책임과 무관심이 반죽이 되어 있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이오.

그러나 시인의 감정이란 얼마나 빠르고 복잡하다는 것을 세상치들이 모르는 것뿐이오. 내가 들개에게 길을 비켜 줄 수 있는 겸양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金剛心)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그래서 쓰지 못하면 죽어 광석이 되어 내가 묻힌 척토(瘠土)를 향기롭게 못한다한들 누가 말하리오. 무릇 유언이라는 것을 쓴다는 것은 80을 살고도 가을을 경험하지 못한 속배(俗輩)들이 하는 일이오. 그래서 나는 이 가을에도 아예 유언을 쓰려고는 하지 않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그런데 이 행동이란 것이 있기 위해서는 나에게 무한히 넓은 공간이 필요로 되어야 하련마는 숫벼룩이 꿇어앉을 만한 땅도 가지지 못한 내라, 그런 화려한 팔자를 가지지 못한 덕에 나는 방안에서 혼자 곰처럼 뒹굴어 보는 것이오. 이래서 내 가을은 다 지나가고 뒤뜰에 황화(黃化) 한 포기가 피어있으니 어느 동무가 술 한 병 들고 오면 그 꽃을 따서 저 술 한잔에도 흩어주고 나도 한잔 마셔 보겠소
계절의 표정
한여름내 모든 것이 싫었다. 말하자면 속옷을 갈아입고 넥타이를 반듯하게 잡아매고 그 귀에 양복을 말쑥하게 손질해 입는 것이 귀찮을 뿐 아니라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기실 큰 짐이었다. 어쩌면 국이 덤덤하고 장맛이 소태같이 쓰고 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사렸다. 그러자니 혹 전차 안에서나 다방 같은 데서 친한 동무를 만나서도 꼭 않아서는 안 될 인사말밖에 건네지 않았다. 속마음으로는 미안한 줄도 아는 것이지마는 하는 수 없었다. 대관절 사람이 모두 귀찮은 데는 하는 수 없었다. 그래서 금년 여름 동안은 아주 사무적인 이외에 겨우 몇 사람의 동무와 만나면 바둑을 두거나 때로는 빌리어드를 쳐봐도 손들이 많이 오는 데보다는 될 수 있으면 한산한 곳을 찾았다. 그다지 좋아하던 맥주조차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그만이었다. 그다지 자주는 못 만나도 그리울 때면 더러는 찾아가 보고자 한 적도 있었건만 도무지 몸이 듣지 않는다. 대개는 제대로 만들어진 기회에 길손처럼 만나서는 흩어지고 잠자리에 누워서 뉘우쳐 보는 것이어서 이제야 비로소 뉘우친다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여름 동안은 책 한 권 책답게 읽어 보지 못했다. 전과 같으면 하늘이 점점 맑고 높아 오는 때면 아무런 말도 없이 내 가고저운 곳으로 여행이라도 갔으련만 어쩐지 여정(旅情)조차 느껴지지 않고 몸도 마음도 착 까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짐짓 가을에 뺨을 부비며 항분(亢奮)해 보고 울어라도 보고자 한 네 관습이 아직 살아 있었다는 것은 계절을 누구보다도 먼저 느낄 만한 외로움이 나에게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밤에 안두(案頭)에 쌓여 있는 시집들 중에서 가을에 읊은 시들을 한두 차례 읽어 봤다. 그 중에서 대표적이고 세상의 문학인들에게 한 번씩은 으레 외지는 것으로 폴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를 비롯하여 르미이 드 구르몽의 <낙엽시>와 <가을의 노래>는 너무도 유명한 것이지마는, 이 불란서의 시단을 잠깐 떠나서 도버해협을 건너면 존 키이츠의 <가을에 붙이는 시>도 좋거니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낙엽시>도 읽으면 어딘가 전설의 도취와 청춘의 범람(氾濫)과 영원에의 사모에서 출발한 이 시인의 심각해 가는 심경을 볼 수 있어 좋으려니와, 다시 대륙으로 건너오면 레나우의 <추사(秋思)>, <만추(晩秋)>는 읊으면 읊을수록 너무나 암담하고 비창(悲愴)해서 눈이 감겨지는 것이나 다시 리리엔 크론의 <가을>같은 것은 인상적이고 눈부신 즉흥을 느낄 수 있는 가을이언마는 철인 니체의 <가을>은 그 애매(愛妹)의 능변으로도 수정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을 찢어 놓는 <가을>이다.

여기서 다시 북구(北歐)로 눈을 돌리면 이곳은 지리적인 까닭일까, 가을이 원체 짧은 까닭일까. 가을을 읊은 시가 다른 지역보다 매우 적은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러시아의 몇 날 안 되는 전원의 가을을 읊은 세르게이 에세닌의 <나는 아끼지 않는다>라든지, <잎 떨러진 단풍>과 <겨울의 예감> 등등은 농민들의 시인으로서 그가 얼마나 망해 가는 농촌의 구각(舊殼)을 애상해 한 데 천부의 재질을 경주했는가 엿볼 수 있어 거듭거듭 외보거니와 여기서 나의 가을 시 순례는 마침내 아시아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그 중에도 시문학의 세계적 고전이며 그 광휘가 황황(煌煌)한 3천 년 전의 가을을 읊은 시전(詩傳) <국풍겸가장(國風兼葭章)>을 찾아보고는 곧 번역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제 것이나 남의 것을 가릴 것 없이 고전을 번역해 본다는 데는 망령되이 붓을 댈 것이 아니라 신중한 태도를 가질 것은 두말 할 바 아니나, 그것이 막상 문학인 데야 번역 안 될 문학이 어디 있겠느냐는 철없는 생각에 나는 그만 그 일장을 번역해 보고 말았다.

갈대 우거진 가을 물가에 찬 이슬 맺어 무서리 치도다. 알뜰히 못 잊을 그 님이시고 이 강 한 가 번연히 계시련만. 물따라 찾아 오르려 하면 길은 아득해 멀기도 멀세라. 물따라 찾아 내리자 하면 그 얼굴 그냥 물속에 보여라.

이렇게 겨우 3장에서 1장만을 역했을 때다. 홀연히 사지가 뒤틀리는 듯하고 오슬오슬 추우면서 입술이 메마르곤 하였다. 목 안이 갈하고 눈치가 틀리기도 하였지마는 그냥 쓰러진 채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다음날 아침에 자리에 일어났을 때는 머리가 무거운 것이 지난밤 일이 마치 몇천년 전에도 꿈속에서나 지난 듯 기억에 어렴풋할 뿐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병이란 것을 깨달았다. 다만 가을에 대한 감상만 같으면 심경에나 오지 육체에 올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딴은 때가 늦었다. 웬체 나라는 사람은 황소같이 튼튼하지는 못해도 20년 내에 물에 씻은 듯 감기 고뿔 한 번 시다이 못해 보고 병없이 지내온 터이라 병에 대한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고, 때로 혹 으스스하면 좋은 양방(加味淸酒鷄卵湯 이란 것이 있어 酒黨들은 국적을 물을 것도 없어 대개 짐작을 한다)이 있어 요번에도 그것이면 무려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병이라고 생각한 때는 병이 벌써 뿌리를 단단히 박은 때요, 사실 병이 시작된 때는 첫여름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귀찮고 거북하고 말조차 여러 번 하기 싫었던 모양인데, 미련한 게 인생이고 미련한 덕분에 멋모르고 가을까지 살아 왔다는 것은 아무런 기적이 아니라 고열에 시달리면 매약점에 들어가 해열제를 한 봉 사고 아무 데나 다방에 들어가면 더운 가배와 함께 마시면 등골에 땀이 촉촉하게 젖으며 그날 볼 잡무를 다 볼 수 있는 게 신통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권태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나는 또 한 가지 묘책을 얻었다는 것은 요놈 쉴 새 없이 나를 습격해 오는 권태를 피하려고 하지않고 권태를 될 수 있는 대로 친절하게 달래어서 향락하려고 했다. 그래서 흉보지 않을 만하면 사무실, 응접실, 살롱 할것없이 귀가 묻힐 만큼 의자에 반은 누운 듯 지내왔다. 담배를 피우며 입술을 조붓하게 오므리고 연기를 천장으로 곱게 불어 올리는 것이었다. 거기에 나는 갠 날의 무지개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와 마주 앉은 벗들에게 무료를 느끼지 않도록 체면을 차리자면 S는 희랍이나 로마의 신화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나도 열이 내린 틈을 타서 서반아의 종교 재판이나 <아라비안 나이트>의 어느 대목을 되풀이하면 그 자리는 가벼운 흥분이 스쳐갔다.

그때는 벌써 처마 끝에 제법 굵은 왕벌들이 날아들었다 간 다시 먼 곳으로 날아가고, 들길가에 보랏빛 들국화가 멀지 못한 서릿발에 다투어 고운 날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나는 또 길들을 걷기에 재미를 붙여 보려고도 했다. 혼자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기도 전에 시외의 나만가는(나는 3,4년 동안 나 혼자 거닐어 보는 숲이었다) 그 숲속으로 갔다. 거기도 들국화는 피어 햇살을 기울게 받아들일 때란 숲속에서만 볼 수 있는 운치와 어울려 마치 보랏빛 연기가 피어 오르는 듯 그윽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곳을 오래 방황할 수는 없다는 것은 으슬으슬 추워지는 까닭이며 따라 내 몸이 앓고 있다는 표적이라 짜증이 나고, 그래서 짚고 간 지팡이로 무자비하게도 꽃송이를 톡톡 치면 퉁겨진 꽃송이들은 낙화처럼 공중을 날아 내 머리와 어깨 위에 지는 것이고, 나는 그만 지쳐서 가쁜 숨을 돌리려고 미친 사람처럼 길을 찾아 나오곤 했다.

길옆 잔디밭에 앉아 숨을 돌리며 생각해 본다. 아무리해도 올 곳은 마음은 아니었다 하지마는 길 가는 놈은 어째서 나를 비웃고 지나는 거냐? 대체 제놈이 무엇인데 내가 보기엔 제가 미친 놈이 아니냐 ? 그꼴에 양복이 무슨 양복이냐? 괘씸한 녀석하고 붙잡아 쌈이라도 한판 하지 않으면 내 화는 풀릴 것 같지 않아서 보면 벌써 그 녀석은 어딘지 가고 없다. 이 분을 어디다 푸느냐? 곰곰이 생각하면 그놈 한 놈뿐만 아니라 인간 놈이란 모두가 괘씸하다. 어째서 나를 비웃고 업신여기는 거냐, 내가 누군줄 알고, 나는 아직 이 세상에 네까짓 놈들 하고 나서 있지 않다. 나는 아직 이 세상에 네까짓 놈들 하고 나서 있지 않다. 또 언제 이 세상에 태어날는지도 모르는 현현(玄玄)한 존재이다. 아니꼬운 놈들이로군 하고 별러댈 때에는 책상에 엎어진 채로 열이 40도를 오르락내리락한 때였다.

벗들이 나를 달랬다. 전지 요양을 하란 것이다. 솔깃한 말이라 시골로 떠나기로 결정을 했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갈 곳이 어디냐? 한 번 더 생각해 보지 않 수 없었다. 조건을 들면 공기란 건 문제 밖이다. 어느 시골이 공기 나쁜 데야 있을라구. 얼마를 있어도 싫증이 안 날데라야 한다. 그러면 경주로 간다고 해서 떠난 것은 박물관을 한 달쯤 봐도 금관, 옥적(玉笛), 봉덕종(奉德種), 사사자(砂獅子)를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날 까닭은 원체없다. 그뿐인가, 어디 일초 일목(日草一木)과 일토 일석(一土一石)을 버릴 배 없지마는 임해전(臨海殿) 지초(支礎)돌만 남은 옛 궁터에서 가을 석양에 머리칼을 날리며 동남으로 첨성대를 굽어보면 아테네의 원주(圓柱)보다도, 로마의 원형 극장보다도 동양적인 그 주란 화각(朱欄畵閣)에 금대 옥패(金帶玉佩)의 쟁쟁한 옛날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거기서 나의 정신에 끼쳐 온 자랑이 시작되지 않았느냐? 그곳에서 고열로 인해 죽는다고 하자. 그래서 내 자랑 속에서 죽는 것이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냐? 이렇게 단단히 먹고 간 마음이지만, 내가 나의 아테네를 버리고 서울로 다시 온 이유는 시골 계신 의사 선생이 약이 없다고 서울을 짐짓 가란 것이다. 서울을 오니 할수없어 이곳을 떼를 쓰고 올밖에 없었다.
나의 대용품 현주,냉광
대용품을 얘기하기보다는 우선 적용폼(適用品)의 내력을 말해 보겠소. 장신구로 말하면 양복이나 오버가 모두 연전(年前)에 장만한 것이 되어서 속(俗) 소위 '스무'란 한 올도 섞이지 않았소.

그런데 첫여름에 교피(鮫皮) 구두를 한 켤레 신어 본 일이 있었는데, 그 덕에 여름 비가 그다지 많이 왔는가 싶어 금나 벗어버리고 지금은 없소, 식용품에는 가배에 다분히 딴놈을 넣는 모양이나 넣을 때 보지 않는만큼 그냥 마십니다마는 그도 심하면 아침에 미쓰꼬시에 가서 진짜를 한 잔 합니다. 버터는 요즘 대개는 고놈 '헷드'니 '라아드'니 하는 것을 주는데 아무튼 고수한 맛이 없더군요. 그래서 잼이나 마마레드는 먹고 고놈은 그냥 버려 둡니다.

그런데 대용품이라면 요즘은 모두 시국(時局)과 불가분의 관계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은 옛날부터 이 대용품이 있었습니다. <사례편람(四禮便覽)>에 보면 대부(大夫)의 제(祭)에는 오탕(五湯)을 쓰는 법이었는데, 그 오탕 중에는 생치탕(生雉湯)이 한몫 끼이는 법이나, 제사가 여름이면 생치탕이 없으므로 계탕(鷄湯)을 대용하는 것이며, 술도 옛날에 자가용(自家用)을 빚을 수 있을 때는 맨 처음 노란 청주(淸酒)를 떠서 제주(祭酒)를 봉(封)하고 난 뒤에 손을 대접하곤 했으나, 자가용 주(酒)가 없어진 뒤는 술을 사온 것은 부정(不精)하다고 예설(禮設)에 있는 대로 냉수를 청주 대신 '현주(玄酒)'라고 쓰는 법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을 속이기 쉽다는 것보다 그들의 신에 대한 관념이 '양양히 그 위에 계신 듯' 하다는 말로 보면, 나도 술대신 현주를 마시고 혼연히 취한 듯하다고 생각해 볼까하오.

그리고 옛날 어떤 선비는 청빈한 집이라 등잔을 켤 형세가 못 돼서 여름이면 반딧불을 잡아서 글을 읽었고, 때로는 달빛을 따라 지붕 위에서 글을 읽은 이도 있었다 하니 이도 말하자면 대용품인 것은 틀림없으나 그럴 듯 풍류이기도 하지 않소, 요즘은 화학자들이 이 반딧불과 월광을 화열(火熱), 전열(電熱) 등 모든 열광의 대용품으로 자자(孜孜)히들 연구하는 모양인데, 이러한 냉광(冷光)이 비록 완성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벌써부터 애용하고 있는 터이오. 지금도 나는 휘황찬란한 전열 밑에서 보다는 무엇을 사색할 필요가 있을 때는 월광(月光)을 따라 성 밑이나 산마루턱을 혼자 거닐기도 하오. 그것도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위를 밤 깊이 걸어다니면 그야말로 냉광은 질식된 내 영혼을 불러 살리는 때가 있는 것이오.
무희의 봄을 찾아서
-박외선(朴外仙) 양 방문기-
동경을 가거든 무용 조선의 어여쁜 기사(騎士)들을 만나 보아 달라는 것이 <창공(蒼空)> 편집인들의 간절한 부탁이었다. 그러나 내가 동경에 왔을 때는 정에 끌려 거절하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 이유로는 나같이 무용에 대해서 문외한인 사람이 그들을 만서 무엇을 어떻게 인터뷰할까 하는 것과, 동경에 있는 조선의 무용가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 내 기억에 있는 <무용 인명 사전>을 뒤져 보아도 15만 불의 개런티를 받고 아메리카로 간다는 최승희(崔承喜) 여사는 예(例)의 경도(京都) 공연 무대에서 불의의 기화(奇禍)를 당했을 때이므로 동경에 있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는 자신이 '나의 자서전'이란 것을 써서 세상이 다 아는 판이니 내가 새로이 붓을 들 것도 없고, 동대 미술과를 나온 박씨는 구주(歐洲)로 무용 행각을 떠난 지 십여 일이 되었으며, 김민자(金敏子)양은 그 선생인 최 여사를 따라 순연(巡演) 중에 있었으므로 만날 도리가 없고, 다만 남아 있는 한 분이 내가 이에 쓰려는 박계자(朴桂子) 양이다.

그러나 박 양을 만나는 일순 전까지도 나는 여간 불안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박 양은 다까다 세이꼬 여사의 문하에서 수업한 지 만 5개년인 금년 5월 5일에는 자기 자신이 당당한 일개 무용가로서 무용 조선의 처녀지를 개척할 무희라면 박 양에게 너무나 과대한 짐일지는 모르나, 하여간 그 길을 걷고 있는 박 양은 봄의 시즌을 앞두고 자기의 공연 준비와 그 선생인 다까다 여사의 공연에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임무를 가지는 모양이었다.
내가 처음 만나던 전날 전화를 3, 4차나 걸었을 때 그연구소 사무실의 대답에 의하면 일간 공연에 쓸 의상 준비로 외출하고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경성에서 온 사람인데 전할 말이 있으니 박 양이 들어오는 대로 전화를 걸어 달라는 부탁을 하여 두었으나, 종시 아무런 통지도 그날은 받지 못했다.

그 다음날 아침 아홉 시, 박 양의 전화를 받은 나는 12시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정각이 30분을 지난 후 명함을 받아 든 박 양은 나를 응접실로 맞아들었다. 간단한 인사말이 끝나고 곧 내의(來意)를 말하니 어디까지나 명랑한 박양이면서도 "아직 무엇을 알아야지요"하는 것은 처녀다운 경양이었었다.
"처음 배우기는 17세! 글쎄, 거기 무슨 동기라든지 이유랄 거야 있나요. 소학교 시대부터 무용이 좋아서 시작했지요!"하는 대답에 나는 '이 작은 아씨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는 행복된 아씨로구나' 하고 속으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유쾌하였다.
"제일 처음 무대에 선 시일은 5년 전 10월이고, 베토벤의 <학대받는 자에게 영광있으라>와 <가을>이었지요"하는 박 양의 눈은 무슨 광영을 꿈꾸는 듯도 하였다."독자적으로 공연을 한 것은 어느 때쯤 됩니까?"
"그것이 아마 재작년 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창작이라고 발표한 것이 <사랑의 꿈>입니다" 하고는 이어서 "글쎄요! 조선의 고전 무용이라고 해도 저는 생각하기를 어떤 의상이라든지 그런 형식에 제약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옷이야 어떤 것을 입었든지 새로운 발레를 춤추려는 노력뿐입니다. 내가 이태리 무용이 된다거나 러시아 무용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아요? 다만 소박한 조선의 고전 무용에 현대적인 감각을 담아서 신흥 무용을 완성한다는 것은 조선의 문화적 정신과 전통에서 자라난 사람들이니만큼 결국 그 이데올로기에 있으리라고 밖에 아직은 더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는 박 양은 어디까지나 남국적인 정열의 주인공이었다.
"무용과 리얼리즘은?"
나는 이렇게 한 번 물어 보았다.
"선생님은 이론 방면은 무용 비평가에게 맡길 일이고 무용가는 실지에 숙련만 하라고 해요" 하면서 연막탄을 한 개 터뜨리고는, "무용이라고 리얼리즘을 전혀 부정할수야 있나요? 그렇다고 해서 로맨티시즘도 영영 부정하긴 싫어요."

이때 하녀가 홍차와 케이크를 가져왔다. "차가 식기 전에...." 하는 박 양의 서비스도 그만하면 만점에 가깝고, 따라서 말은 다른 길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처음 발표한<사랑의 꿈> 이란 어떤 무용이었던가요?"
"그건 무어 한 개 환상의 세계를 그려 보았지요" 하고 웃어 버리면서도 자기의 첫 작품인만큼 상당한 애착을 가진 듯하였다. "한 개 무용을 제일 많이 춘 것은?""글쎄요, <카프리스>, <사(死)의 도피> 그런 것이에요. 그러나 선생과 같이 출연을 하게 되면 다른 동창들도 있고 때로는 제가 나갈 때도 있으나 대개 솔로는 선생이 나가지요. 처음 발표한 뒤의 감상이라고 하여도 제가 알 수가 있읍니까? 그저 무용에만 열중했을 뿐이지요. 나중 혹 음악 신문 같은 데서 비평을 보면 매우 명랑한 춤이라고 한 것을 볼 때마다 얼굴이 홧홧해요" 하며 겸손은 하나 상당한 자신은 가지는 모양! 창작은 연구소에 들어와 3년째 되는 해부터 전부 자기가 하게 되었다 하며, 무용연구소의 시스템에 대해서 한참 동안 얘기가 계속되고 어떤 연구소는 소질만 있으면 막 뽑아 들이는 데도 있으나 다까다 연구소는 5년이란 기한을 채워야 된다는 것과 박양 자신이 5, 6명의 개인 교수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올해부터는 저절로 독립을 하여야 될 터인데 어트랙션을 가질 필요는?"

이렇게 속사포의 탄알 같은 질문을 해보았는데, 박 양은 유유히 한참 웃고 나서 "결국은 조선에 가야지요. 그러나 아직 부족한 게 많으니 더 준비를 해야지요. 성공을 빨리 하려고 초조하지는 않으렵니다" 고 질문과는 아주 정반대로 착 까라지는 것이었다.
"조선에 와서 첫 공연을 언제 하느냐고요? 글쎄요, 금년 안으로 하겠지요마는 동경서 한 번 공연을 먼저 할 것같습니다." "지방 순연(巡演)은 몇 번이나 다닙니까?"
"매년 춘추 2회이고 때로는 4, 5회도 되나 그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작년 여름엔 대만에 갔다 왔는데, 요전에 대만에서 공연해 달라는 교섭이 있었어요."
"그래, 대만은 가시나요?"
"글쎄요, 될 수 있으면 조선 공연을 하고 갈까 해요. 음악은 무엇을 하느냐구요? 피아노 외에는......" 하고 한 참 웃다가, "글쎄요, 무용과 일반 예술에서 제일 관계가 깊은 것은 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박 양의 무용은 공간에 그리는 박 양의 깨끗한 환상의 시인 것이다. 그리고 얘기가 극으로 옮겨 갔을 때, "참, 무용극을 한 번 한 일이 있어요. 그것은 물론 선생과 같이 출연했는데 그 극은 <전쟁>이란 것이었어요. 공연날이 3일 남아서 전쟁보다 더 바쁜 중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문부(聞訃)를 하고 선생에게 집으로 가겠다고 하였더니, 그것이 잘 되진 않고 전쟁하는 셈치고 출연을 하였더니 결과가 나쁘지 않고 재미도 있었어요" 하는 박양의 오늘이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눈물겨운 무용전도 있었던 것이었다. "영화는 자주 구경을 다닙니다. 좋아는 하면서도 자주는 못 가요. 장래에 영화 배우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고요? 그런 것을 생각한 일은 없어요."
"그래도 <오야게 아가하지>라는 유구(琉球)의 <토민의 영웅>을 동경 발성(發聲)에서 영화화할 때 로케이션에 갔다 오지 않았겠어요."
"글쎄요, 그것은 춤추는 장면이었는데 다까다 무용 연구소에 교섭이 있어서 선생이 저를 가라니 갔을 뿐이었지요."
"문학에 대한 취미는?"
"시는 좋아해요. 괴테나......" 하는 것을 보면 <들장미>를 콧노래 삼아 부를 듯한 아가씨였다.
"일본 시인으로는?"
"이꾸다 슌게쓰(生田春月)의 시는 좋아요" 하고 몇 번이나 '이꾸다'란 말을 거듭하였다.

"장래의 가정은?" 하고 묻고 어떤 대답이 나오나 하고 이 아가씨의 얼굴을 옆눈으로 잠깐 보았다. "역시 예술가다운......." 하며 말끝은 웃음으로 흐리고 가벼운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이는데 검은 드레스에 검향빛 목수건과 자줏빛 오버의 품위 있는 장속(裝束)이었다. (단, 그날의 응접실은 좀 추워서 나도 오버를 입었다.)
"유행에 대해서는?" 하니까,
"직업 관계로 또는 젊은 마음에 화려한 것은 좋아요.그러나 모드라고 해서 빛깔이 조화되지 않는 것이나 상없는 첨단은 즐겨하지 않아요. 숭배하는 예술가라고 특정한 것은 없어요. 말하자면 훌륭한 예술가는 모두 숭배하지요. 그러나 역시 무용을 하니까 크로이스베르크는 좋아요" 하며 독일이 낳은 이 세계적 무용가의 약전(略傳)과 그 무용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하는 박 양은 완전히 명랑한 정열을 발로하는 것이었다.
"위인으로는?" 하고 물어 보면 창졸간에 누구를 말할지 곤란한 듯이 "난 몰라요" 하며 웃어 버렸다.
"독서는 많이 못 합니다. 하루에도 3,4시간은 꼭 하려고 노력은 하나 공연에 바쁘면 뜻대론 안 돼요. 스포츠 말입니까? 전 이래두 학생 시대엔 발레 선수였답니다. 좋아하긴 럭비가 좋아요."
그러나 구경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 처녀다운 가벼운 한숨이었다. '이 명랑한 무희를 어떻게 한번 곤란케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한 수를 깨달았다.

그래서 눈으로는 보면서도 시침을 떼고, "연애에 대한 경험을 하나 들려주시오."
"글쎄요, 동무들이 말하기를 저는 연애에는 저능하다고 해요" 하며 새빨간 흥분을 남의 말같이 싹 돌리고 말은 계속되는 것이었다.
"조선에는 무용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책임있는 몸인 듯해서 경솔하게는 연애를 해보려는 생각도 않을뿐더러 아직은 그렇게 급한 문제도 아니니까요" 하며 교묘하게 말끝을 돌리는 박 양의 두 뺨에 홍조가 살그머니 돌고 맞은편 유리창 바깥을 지나 멀리 보이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샘물 같은 그 눈동자는 조금도 우울을 모르는 듯하였다. 마치 그 푸른 하늘의 한없이 높고 깊어보이는 거기에 그 예술의 인스피레이션이 생겨나는 것도 같이! 이때 벌써 오후 두 시 반! 세 시부터는 그 다음날 히비야 공회당에 공연이 있어 공부가 시작된다기에 그만 그곳을 떠나기로 하고, 영화 배우로는 조엘 메크리나 프레더릭 마치도 좋으나 가르보의 신비적인 연기에는 말 할 수 없는 애착을 갖는다는데 나는 그만 나와 버렸다.
12일 오후 7시 반, 봄비가 시름없이 내리는데도 나는 히비야로 갔다. 벌써 박 양의 출연 시간이었다. <포도>는 거의 끝이 나고 <카네이션>이 시작되려는 때였다.

그날은 다까다 세이꼬, 이시비 바꾸, 우찌다 에이이찌, 시미즈 시즈꼬 등등 그 방면에 동경에서도 유수한 이들이 모두 공동 출연을 하였으며, 나는 밤 열 한 시 차로 동경을 떠나며 곱게 피어오른 카네이션의 맑은 향기를 머리 속에 그려도 보았다.
산사기
S군! 나는 지금 그대가 일찍이 와서 본 일이 있는 S사(寺)에 와서 있는 것이다.그때 이 사찰 부근의 지리라든지 경치에 대해서는 그대가 나보다 잘 알고 있겠으므로 여기에 더 쓰지는 않겠다. 그러나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숙사는 근년에 새로이 된 건축이라서 아마도 그대가 보지 못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 청렬(淸洌)한 시냇물을 향해서 사면의 침엽수 해중(海中)에서 오직 이 집안은 울창한 활엽수가 우거져 있기 때문에, 문 앞에 손이 닿을 만한 곳에 꾀꼬리란 놈이 와 앉아서 한시도 쉴 새 없이 노래를 불러 주는 것이다. 내 본래 저를 해칠 마음이 없는지라, 저도 그런 눈치를 챘는지 아주 안심하고 아랫가지에서 윗가지로, 윗가지에서 아랫가지로 오르락내리락 매끄러운 목청이란 귀엽기도 하려니와, 그 노란 놈이 꼬리를 까부는 것이 재롱스러워, 나에게 날아오라고 손을 내밀면 먼 가지로 날아가고, 어디선가 깊은 산골에서 뻐꾹새 소리가 들려 오곤 하는데, 돌틈을 새어 흘러가는 시냇물이 흰 돌 위에 부서지는 음향이란, 또한 정들일 수 있는 풍경의 하나이다.

S군! 그대와 우리들의 친한 동무들이 이 글을 읽을 때는 아마 나는 이 산사(山寺)를 떠나서 어느 해변이나, 또는 아무도 일찍이 가본 일이 없는 도서(島嶼) 속에서 있을지도 모르고, 내가 지금 붓을 들고 앉아 있는 책상 앞에는, 도회로부터 새로운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이 모여 앉아 화투를 치거나, 마장을 하는 따위의 다른 풍속이 벌어지리라, 그러므로 이런 생각을 하면 모처럼 얻은 오늘의 유쾌한 기억을 더럽힐까 소름이 끼칠 것만 같다.
S군! 그러면 내가 금번 이곳에 온 이유가 어디 있는가도 생각해 보리라, 그러나 이유란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은 내 서울을 떠날 때, 그대에게 부친 엽서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행이란 이유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고 사무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내가 여행을 한다는 것은 여정(旅情)을 느낄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날씨가 개면 개었다고, 흐리면 흐렸다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분다고, 봄이면 봄이라고, 여름은 여름이라고, 가을은 가을이라고, 이렇게 나는 여정을 느껴 보고 산으로 가고자 하면 산으로, 바다로 가고자 하면 바다로 가는 것이다, 그도 계획을 한다거나 결의를 한다면 벌써 여정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니깐, 한번 척 느꼈을 때는 출발이다. 누구에게 알려야 한다든지, 또 여장(旅裝)을 차려야 한다면 그는 벌써 뜻대로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 출발시를 앞두고 그대에게 엽서 한 장을 쓴다거나, 내 아우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금 어디 가는데 언제 서울에 온다고 하면, 그것도 나에겐 일종의 여정이지 결코 의무의 수행은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속마음으로 어딜 좀 가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을 때는, 나는 벌써 여행중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짚신도 제 짝이 있는 법이라. 나와 같이 이런 사람도, 뜻이 비슷한 사람이 있어 마침 만나게 되자 그 C라는 동무가 바다로 가자는 말을 하였고, 나도 그러자고 의론이 일치하자 간다는 것이 도시로도 미완성이고, 항구로도 설익은 곳이라, 먼 데서 오신 손님을 대접하는 데는 아직 몰풍정(沒風情)하기 짝없었다. 그래서 하룻밤을 지나고 표연히 차에 오르니, 웬만하면 서울로 바로 오는 것이 보통이겠는데, 여기에 나라는 사람의 서울에 대한 감정이란 또한 남달리 델리키트한 것이 있어, 그다지 수월한 것이 아니란 것은 마치 명가집 가식이 성격에 못 맞는 결혼을 하고 별거를 하다가, 부득이한 사정이라도 있어 때때로 본가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될 그때의 심경과 방불한 것이다.
그래서 될 수만 있으면 술집에라도 들어서 얼글하게 한잔하고 오듯이, 나 역시 서울이 가까워 오면 슬쩍 옆길로 들어서서 한참 동안이라도 딴청을 떠보는 것인데, 금번 이 산사를 찾아온 것도 그 본의가 명산 대천에 불공을 드리고 타관 객지에서 괄시를 받지 않으련 게 아니라, 한잔 들고 흥청거려 보자는 수작이었는데, 웬걸 와서 보니 동천(洞天)에 들어서면서부터 낙락장송이 우거진 사이, 오줌 냄새가 물씬 나는 산협을 물소리 들으며 찾아 들면, 천년 고찰의 태고연한 가람이 즐비하고, 북소리 둥둥 나면, 가사 입은 늙은 중들은 읍하고 인사하는 풍습도 오랫동안 못 보던 거라, 새롭고 정중한 것이었다.

S군! 나라는 사람이 이순간 이곳에서 무엇을 느꼈으리라고 그대는 생각하는가? 속담에 절에 오면 중이 되고 싶다는 말이야 있지마는, 설마한들 내가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일시에 인연을 끊고 공산나월(空山羅月)에 두견을 벗삼아 염불 공부로 일생을 덧없이 보낼 리야 있으랴마는 그래도 생각해 볼 것은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영원히 남에게 연민은커녕 동정 그것까지도 완전히 거부할 수 있는 비극의 '히어로'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결국 되는대로 살아지는 것이 가장 풍자적이고, 그러므로 최대의 비극은 최대의 풍자와 혈연(血緣)을 가지는 동시에 아주 허탈한 맛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때다. 나와 동행한 C는 산비탈을 내려오며 목가(牧歌)를 부르는 것이었다.
아마도 '치를 알프스'를 오르내리는 양치는 노인을 생각해 낸 모양이었다. 석양도 재를 넘고 시냇물도 찬 기운이 점점 더해 오면 올수록 사하촌(寺下村)의 뜻뜻한 산채국이 여간한 유혹이 아닌 것이다. S군! 우리가 평소 도시에 살면 생활의 태반은 관능(官能)의 지배를 받는 것이지마는 이런 산간 벽지로 찾아오면 거의는 본능의 지배를 만족히 알면 그만이다.

S군! 이런 말은 이제 새삼스레 늘어놔 보았자 그대가 그다지 흥미를 느낄 것은 아니라 그만두거니와, 내가 여기 와서 진정 생각해 보는 것은 해당화다. 옛날 우리 향장(鄕莊)에는 화단에 해당화가 많이 심겨 있었는데, 내가 어릴 때 그 꽃을 꺾어서 유리병에 꽂아 놓으면 내 어린 아우들이 와서 그것을 제 책상 위에 가져다 놓는 것이고, 나는 다시 내 책상 위로 찾아오면 그것이 그만 싸움이 되고 했는데, 지금쯤 생각하면 어릴 때 일이라 도리어 우습긴 하나, 오늘 이곳에서 해당화가 만발한 것을 보니 내 동년(童年)이 무척 그립고저워라.

S군! 그런데 이곳 사람들을 보아 하니 산간 사람이라 어디나 할것없이 순박한 맛은 그리 없는 바 아니나, 기왕 해당화를 심으려면 그 맑은 시냇물가로 심었으면 나중 피는 놈은 푸른 잎 사이에 타는 듯한 정열을 찍어 붙여서 얕은 그늘 사이로 으수이 조화되는 계절을 자랑도 하려니와, 먼저 지는 놈은 흰 돌 위에 부서지는 물결 위에 붉은 조수(潮水)를 띄워 가면 얼마나 아름다움 풍정(風情)이겠나? 하물며 화판(花瓣)이 산 밖으로 흘러가서 산외(山外)에 어자(漁子)가 알고 오면 어쩔까 하는 공구(恐懼)하는 마음이 이곳 사람들에게도 있을 수 있다면, 아마 나까지 이 글을 써서 산외에 있는 그대에게 알리는 것을 혀의스리 하리라. 그러나 S군 ! 역시 산맹(山氓)들이라 밉기도 하려니와 사랑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오늘은 이만 하고 뒷산 숲 사이에 부엉이가 밤을 울어 새일 동안, 나는 이곳에서 꿈을 맺어 볼까 한다.
그러나 다음 내 글이 그대에게 닿을 때는, 벌써 나는 다른 산간이나 또는 해상에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헤아려 보면서 지금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아라.
연륜
C여! 그대의 글월은 받아 보았다. 그리고 그 말단에 "혼자서 적막하여 못 견딜 지경"운운한 것도 그것이 어느 의미에서든지 그 의미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C여! "진정한 동무란 모두 고독한 사람들"이란 것을 우리는 알베르 보나아르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몸으로써 겪은 바가 아닌가? 거대한 궁륭을 세워 올리는 데 두어 개의 기둥이 있으면 족한 것과 같이 우리들이 인간에 대해서 우리들의 생각하는 바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두어 사람의 동무가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괜히 마음의 한옆이 헛헛하고 더구나 나그네가 되었을 때 한층 더 절절한 바가 있는 것이지마는 이러할 때면 나는 힘써 지나간 일들을 생각키로 하는 것이다. 그래도 아는 바와 같이 내 나이가 열 살쯤 되었을 때는 그 환경이 그대와는 달랐다는 것은 그대는 쓸쓸할 때면 할머니께서 무명을 잣는 물레 마루 끝 장독대를 혼자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가 봉선화 송이를 되는대로 똑똑 따서는 슬슬 비벼 던지고, 줄 포플라가 선 신작로를 달음질치면 우선 마차가 지나가고, 소 구루마가 지나가고, 기차가 지나가고, 봇짐 장수가 지나가고, 미역 뜯어 가는 할머니가 지나가고, 멸치 덤장이 지나가고, 채전 밭가에 널린 그물이 지나가고, 솔밭이 지나가고, 포도밭이 지나가고, 산모퉁이가 지나가고, 모랫벌이 지나가고, 소금 냄새 나는 바람이 지나가고, 그러면 너는 들숨도 날숨도 막혀서 바닷가에 매여 있는 배에 가 누워서 하늘 위에 유유히 떠가는 흰구름 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나? 그러다가 팔에 힘이 돌면 목숨 한정껏 배를 저어 거친 물결을 넘어가지 않았나? 그렇지마는 나는 그 풋된 시절을 너와는 아주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치 지금 생각하면 남양 토인들이 고도의 문명인들과 사귀는 폭도 됨직하리라,. 물론 그때도 나 혼자 지나는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대부분 독서나 습자의 시간이었고 그 외의 하루의 태반은 어른 밑에서 거처, 음식, 기거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잠자는 동안을 빼놓고는 거의는 이야기를 듣는 데 허비되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란 것이 채장 없이 긴 것이라 지금쯤 뚜렷한 기억은 남지 않았으나 말씀을 해주신 어른분들의 연세에 따라서는 내용이 모두 다른 것이었다. 대개 예를 들면 오인들은 제례(祭禮)는 이러이러한 것이라 하셨고, 중년 어른들은 접빈객(接賓客)하는 절차는 어떻다든지, 또 그보다 매우 젊은 어른들은 청년 예기(銳氣)로써 나는 어떠한 곤란을 당했을 때 어떻게 처사를 했다든지, 무서운 일을 보고도 눈 한 번 깜짝한 일이 없다거나, 아무리 슬픈 일에도 눈물은 사내 자식이 흘리는 법이 아니라는 등등이었다.

C여! 나는 그것을 처음 들을 때 그것이 무슨 말인지는 몰랐고 예사 어린 아이들은 누구나 저런 말을 듣는 것인가 보다 하고 들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멀지 않아 나 자신이 예외없이 당해 보는 것이 아니겠나? 그 무서운, 또 맵고 짜고 쓰고 졸도라도 할 수 있는 광경들을! 그래서 나는 내 아우나 조카들에게라도 될 수 있으면 내가 지나온 이 얘기는 하지 않기로 하였더란다. 그랬더니만 그것이 버릇이 되어서인지 집안에 들면 말썽이 적어지고, 그렇게 되니 어머니께서도 "왜 어릴 때는 재미있고 그렇던 애가 저다지 말이 없느냐"고 걱정을 하시는 것이며, 나 자신도 다소는 말이 좀 둔해진 편인데, 옛날 성현이 말하기를 "민어행이눌어언(敏於行而訥於言)"하라고 하였지마는 지금 나와 같아서는 민어행도 못 하고 눌어언만 한댔자 군자가 될 성싶지도 않고, 또 군자를 원치도 않는만큼 그것은 당분간 걱정이 없으나 결국 내 몸을 둘 곳이 어디이랴. 그래서 나는 요즘 '생각한다'는 데 머물러 보기로 한다. 생각도 그야 여러 가지겠지마는 이것은 나로서 공리적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말썽이 많은 때문이다. 그러니 잠깐 책장을 덮어 두고 현재를 생각하는 것도 너무 속되다는 것은 원래 연륜이 묵지 않은 것은 신비성이 조금도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되고 보면 만만한 것이 과거(過去)인데, C여! 나는 또 어째서 그 아픈 상처를 낱낱이 휘집어내지 않으면 안되겠느냐.

차라리 말썽 없는 산수에 뜻을 붙여 표연히 갔던 길에 뜻밖에도 만고의 명승을 얻은 내력을 들어나 보라. 가을밤, 가는 빗발이 바늘 끝같이 찬 날씨였다. 열 한 시에 서울을 떠나는 동해 북부선을 탄 지 일곱 시간 만에 사냥을 간다는 L과 K를 안변에서 작별하고 K와 H와 나는 T읍에 있는 K의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연선(沿線)의 새벽에 눈을 뜨는 호수! 또 호수! 쟁반에 물을 담은 듯한 내해(內海)에 아침 천렵을 마치고 돌아오는 어범(漁帆)들, 이것이 모두 지방이 달라지면 풍속도 다르게 시시각각에 형형색색으로 처음 가는 손님을 홀리는 것이 아니겠나? 때로는 산을 돌고 때로는 평원을 지나 솔밭 속을 지나는데, 푸른 솔가지 사이로 보이는 양관(洋館)들이 모모의 별장이라 하고 해수욕장이 있다 하나 너무나 대중 문화적이고 그곳에서 얼마 안 가면 T읍, K의 집에서 조반을 마치고 난 나는 K의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아 자동차로 해안선을 십리 남짓 달렸다. 천연으로 된 방파제를 돌아서 바다 속으로 돌진한 육지의 마지막이 거의는 충암절벽(層岩絶壁)으로 된 데다가 동편은 석주들이 죽 늘어선 것이 마치 아테네의 폐허를 그 해상에 옮겨 세운 듯하며,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서편의 만(灣)은 이오니아의 바다와 같이 맑고 푸르고 깨끗하고 조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람이 한번 불면 파도는 동편 석주를 마주쳐 부서지는 강한 음향과 서편 백사(白砂)의 만을 쓸어 오는 부드럽고 고운 음향들이 산 위의 솔바람과 한데 합치면 그는 내가 이때까지 들은 어떠한 대교향악도 그에 미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또다시 눈을 들어 멀리 안계(眼界)가 자라는 데까지 사방을 살피면 금란도(金蘭島)니 무슨 도(島)니 하는 섬들이 저마다 성격을 갖추어 있으면서도 이쪽을 싸주는 풍경이란 그럴 듯한 것이지만 그 많은 물새들의 깃 치는 소리도 때로는 멀리서, 때로는 가까이서, 그러나 끊일 새 없이 들려 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C가 몇 해 전부터 이 고적한 지방에 혼자 와서 살고 있었다는 것은 남이 보기에 외면으로 고적한 것이지 정신상으로는 몇 배나 행복한 것이었을까 하고 생각할 때 해안의 조그만 뒷집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았다. 그만하면 나에게는 베네치아의 궁전에도 비할 수 있는 것이며, 로마의 흥망사라도 그곳이면 조용히 볼 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C여! 이곳이 바로 내가 보고 온 해금강 총석정(叢石亭)의 꿈이었지마는 꿈은 꿈으로 두고라도 고적(孤寂)을 한할 바 무엇이랴? 여기에 모든 사람들을 떠날 수가 있다고 하면 나는 그대를 찾아낼 것이고, 그대는 나에게 용기를 주겠지. 그러면 고독은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연인기
옛날 글에 "인자(仁者)는 요산(樂山)하고 지자(智者)는 요수(樂水)"라 하였으니, 내 일찍이 인자도 못 되고 지자도 못 되었으니 어찌 산수를 즐길 수 있는 풍격(風格)을 갖추었으리요만, 무릇 사람이란 제각기 분수에 따라 기호나 애완(愛翫)하는 바 다르니 나 또한 어찌 애완하는 바없으리요. 그러나 연기(年紀) 장자(丈者)에 이르지 못하고 덕이 고인(古人)에 미치지 못함에 항상 신변쇄사(身邊鎖事)를 들어 사람에게 말하길 삼갔더니, 이에 외람되게 내가 인(印)을 사랑하는 이유를 말하면 거기엔 남과 다른 한가지 곡절이 있는 것이다.그것은 인(印)이라고 해도 요즘 사람들이 관청이나 회사엘 다닐 때 아침 시간을 맞춰서 현관에 썩 들어서면 수위장 앞에서 꼭 찍고 들어가는 목각 도장이나, 그렇지 않고 그보담은 한결 행세깨나 한다는 친구들이 약속수형(約束手形)에나 소절수(小切手)쯤에 찍어 내는 상아나 수정에 새긴 도장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옛날 사람들같이 제법 수령방백(守令房伯)을 다녀서 통인 놈을 데리고 다니던 인궤(印櫃)쪽이 나에게 있을 리도 만무한 것이라 적지않게 고이하기도 하나, 그보다도 이놈 인이란 데 대한 풍속 습관도 또한 여러 가지가 있었으니, 우선 먼 데 사람들을 쳐보면, 서양 사람들은 사인이란 것이 진작부터 유행이 되었는 모양인데, 그것이 심하게 발달된 결과는 소위 사인 마니어가 생겨서 유수한 음악가, 무용가, 배우, 운동 선수까지도 거리에 나서면 완전히 한 개 우상이 되는 것이지마는, 내가 말하려는 본의가 처음부터 그런 난폭한 아희(兒戱)가 아니라 그렇다고 중국 사람들처럼 국제간에 조약을 맺고 '첨자(籤子)'를 한다는 과도히 정중한 것도 역시 아니다.

일찍이 이 땅에는 '수결(手結)'이란 형식으로 왼편 손에 먹을 묻혀서 찍은 일도 있고, '착함(着啣)'이라는 그보다 매우 발전된 양식으로 성자(姓字)밑에 자기 이름자를, 대개는 어조(魚鳥)의 모양으로 상형화해서 그리는 법이 있었는데, 이것은 가장 보편적으로 쓰였고 장구하게 쓰였으니 이것보다도 앞에 쓰여지고 또한 문한(文翰)하는 사람들에게만 쓰여진 것 중에 '도서(圖書)'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글씨나 그림이나 쓰고 그리면 그 밑에 아호를 쓰고 찍었고, 친우간에 시를 지어 보낼 때도 찍는 것이며 때로는 장서표(藏書表)로도 찍는 것이었다.그런데 이 도서는 각수(刻手)나 도장장이에게 돈을 주고 새기는 게 아니라 시서화(詩書畵)를 잘하는 사람들이면 자기 자신이 조각을 한 개인의 여기(餘技)로 하는 것이었으며, 사람에 따라서는 매우 정교한 조탁(彫琢)을 하는이도 있었고, 또 이런 것이라야 진품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 시대에는 이런 풍습이 유행하기를 마치 구주(歐州)의 시인들이 한 가지 여기로써 데상 같은 것을 그리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그런데 이런 풍습이 성행하게 되면 될수록 인재의 선택이 매우 까다로왔다. 흔히 박옥(璞玉)이라는 것이 많이 쓰였으나 상아나 수정도 좋은 것이고, 아주 사치를 하려면 비취나 계혈석(鷄血石)이나 분황석(芬皇石)같은 것이 제일 좋은 것인데, 이것들 중에도 분황석은 가장 귀한 것으로 조선에서는 잘 얻지 못하는 것이다.그런데 우리가 시골 살던 때 우리 집 사랑 문갑 속에는 항상 몇 봉의 인재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나와 나의 아우 수산(水山)군과 여천(黎泉)군은 그것을 제각기 제 호(號)를 새겨서 제 것을 만들 욕심을 가지고 한바탕씩 법석을 치면 할아버지께서는 웃으시며 "장래에 어느 놈이나 글 잘하고 서화 잘하는 놈에게 준다"고 하셔서 놀고 싶은 마음은 불현 듯 하면서도 뻔히 아는 글을 한 번 더 읽고 글씨도 써보곤 했으나, 나와 여천은 글씨를 쓰면 수산을 당치 못했고 인재는 장래에 수산에게 돌아갈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글씨 쓰길 단념하고 화가가 되려고 장방에 있는 당화(唐畵)를 모조리 내놓고 실로 열심히 그림을 배워 본 일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12세의 소년으로 하여금 그 인재에 대한 연연한 마음을 팽개치게 하였으니 내가 배우던 중용,대학은 물리니 화학이니 하는 것으로 바뀌고 하는 동안 그야말로 살풍경의 10년이 지나 갔었다.

그때 봄비 잘 오기로 유명한 남경(南京)의 여관살이란 쓸쓸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 나는 도서관을 가지 않으면 고책사(古冊肆)나 골동점에 드나드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얻은 것이 비취 인장(翡翠印章) 한 개였다. 그다지 크지도 않았건만 거기다가 모시 칠월장(毛詩七月章) 한 편을 새겼으니 상당히 섬세하면서도 자획(字劃)이 매우 아담스럽고 해서 일견 명장(名匠)의 수법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얼마나 그것이 사랑스럽던지 밤에 잘 때도 그것을 손에 들고 자기도 했고, 그 뒤 어느 지방을 여행할 때도 꼭 그것만은 몸에 지니고 다녔다. 대개는 여행을 다니면 그때는 간 곳마다 말썽을 부리는 게 세관리(稅關吏)들인데, 모든 서적과 하다못해 그림 엽서 한 장도 그냥 보지 않는 녀석들이건만 이 나의 귀여운 인장만은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내 고향이 그리울 때나 부모형제를 보고 싶을 때는 이 인장을 들고 보고 칠월장을 한번 외도 보면 속이 시원하였다. 아마도 그 비취인에는 내 향수와 혈맥이 통해 있으리라.

그 뒤 나는 상해(上海)를 떠나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언제 다시 만날는지도 모르는 길이라 그곳의 몇몇 문우들과 특별히 친한 관계에 있는 몇 사람이 모여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을 같이하게 되었는데, 그 중 S에게는 나로부터 무엇이나 기념품을 주고 와야 할 처지였다. 금품을 준다 해도 받지도 않으려니와 진정을 고백하면 그때 나에게 금품의 여유란 별로 없었고, 꼭 목숨 이외에 사랑하는 물품이라야만 예의에 어그러지지 않을 경우이라,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귀여운 비취인 한 면에다 " 贈 S, 1933. 9. 10. 陸史"라고 새겨서 내 평생에 잊지 못할 하루를 기념하고 이 땅으로 돌아왔다.

몇 해 전 시골을 가서 어릴 때 문갑 속에 있던 인재를 찾으니 내 사백(舍伯)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것은 할아버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길 너들 중에 누구나 시서화를 잘하는 놈에게 주라 하셨으나 너들이 모두 유촉(遺囑)을 저버렸기에 할수없이 장서인(藏書印)을 새겨서 할아버지가 끼쳐 주신 서적을 정리해 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아우 수산은 그동안 늘 서도에 게으르지 않아 '도서(圖書)'를 여러 봉 장만했는데, 그중에는 자신이 조각한 것도 있고 인면(印面)도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고 새긴 것과 '오거서일로향(五車書一爐香)'이라고 새긴 큰 인은 거의 진품에 가까운 것이 있으나, 여천(黎泉)이 가졌다는 몇 개 안되는 인은 보잘것없어 때로 내형(乃兄)의 것을 흠선은 해도 여간해서는 제 소유로 만들 가망은 없는 것이고, 나는 아무것을 흠선도 않으려니와 여간한 도서개(圖書個)쯤은 사실로 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나, 화가 H군이 가지고 있는 계혈석에 반야경(般若經)을 새긴 것은 여간 탐스러운 바 아니었지마는, H군으로 보면 그것은 세전지보(世傳之寶)라 나에게 줄 수도 없는 것이고, 나는 상해에서 S에게 주고 온 비취인을 S가 생각날 때마다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지금 S가 어디 있는지 십년이 가깝도록 소식조차 없건마는, 그래도 S는 그 나의 귀여운 인을 제 몸에 간직하고 천대산(天臺山) 한 모퉁이를 돌아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강으로 강으로 흘러가고만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나는 오늘밤도 이불 속에서 모시 칠월장이나 한 편 외보리라. 나의 비취인과 S의 무강을 빌면서
은하수
지나간 일을 낱낱이 생각하면 오날 하로는 몰라도 내일부터는 내남할 것 없이 살어갈 수가 없을 것이다. 웨그러냐하면 다아올날보다는 누구나 지나간 날에 자랑이 더 많었든 까닭이다. 그것도 물질로는 바꾸지 못할 깨끗한 자랑이였다면 그럴수록 오날의 악착한 잡념이 머리속에 떠돌때마다 저도 모르게 슲어지는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말하자면 내 나이가 칠, 팔세쯤 되었을때 여름이 되면 낮으로 어느날이나 오전 열시쯤이나 열한시경엔 집안 소년들과 함게 모혀서 글을 짓는 것이 일과이였다. 물론 글을 짓는다해도 그것이 제법 경국문학도 아니고 오언고풍이나 줌도듬을 해보는 것이였지마는 그래도 그때는 그것만 잘하면 하는 생각에 당당히 열심을 갖었든 모양이였다.

그래서 글을 지으면 오후 세시쯤 되어서 어룬들이 모혀노시는 정자 나무밑이나 공청에 가서 골이고 거기서 장원을 얻어하면 요즘 시한 편이냐 소설한편을 써서 발표한뒤에 비평가의 월평등류에서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과는 달러서 그곳에서 좌상에 모인 분들이 불언중모다 비평위원들이 되는 것이고 글을 등분을 따러서 급수를 맥이는 것인데 거기 특출한 것이 있으면 가상지상이란 급이 있고 거기도 벌서 철이 난 사람들이 칠언대고풍을 지어 골이는데 점수를 그다지 후하게 주는 것이 아니라, 이상(二上), 삼상(三上), 이하(二下), 삼하(三下)란 가혹(苛酷)한 등급을 맥여내는 것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가상지상이란 것이였다. 이 등급을 얻어 한사람은 장원을 했는만큼 장원례를 한턱 내는 것이였다.

장원례란 것은 내는 방법이 여러 가지인데 사람에 딸어서는술한동우에 북어한떼도 좋고 참외 한접에 담배한발쯤을 사오면 담배는 어룬들이 갈러피우고 참외는 아해들의 차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장원을 하면 백지한 권의 상품을 받는수도 있었다. 그것은 유명조선의 유산의 일부를 장학기금으로 한 자원이 있는 것이였다. 이것이 우리네가 받은 학교교육이전의 조선의 교육사의 일부였기도 했다.

그러나 한여름동안 글을 짓는데도 오언, 칠언을 짓고 그것이 능하면 제법 음을 달어서 과문을 짓고 그 지경이 넘으면 논문을 짓고 하는데 이 여름한철동안은 경서는 읽지 않고 주장 외집을 보는 것이다. 그 중에도 [고문진보]나 [팔대가]를 읽는 사람도 있고 [동인]이나 [사초]를외이기도 했다. 그런데 글을 짓고 골이고 장원례를 내고하면 강가에 가서 목욕을 하고 석양에는 말을 타고 달리고 해서 요즘같이 [스포-츠]란 이름이 없을 뿐이였지 체육에도 절대로 등한히 한 것은 아니였다. 그리고 저녁 먹은 뒤예는 거리로 단이며 고시같은 것을 고성낭송을 해도 풍속에 괴이할바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명랑한 목소리로 잘만 외이면 큰 사랑마루에서 손들과 바둑이나 두시든 할아버지께선 [저놈은 맹랑한 놈이야]하시면서 좋아하시는 눈치였다.

그리고 밤이 으슥하고 깨끗이 개인 날이면 할아버지게서는 우리들을 불러 앉히고 별들의 이름을 가르쳐주시는 것이였다. 저별은 문청성이고 저 별은 남극노인성이고 또 저별은 삼태성이고 이렇게 가르치시는데 삼태성이 우리 화단의 동편 옥해화 나무우에 비칠때는 여름밤이 뜻이없어 첫닭이 울고 별의 전설에 대한 강의도 끝이 나는 것이였다.

그런데 한게없이 넓은 창공에 어느 별이 어떻다해도 처음에는 어느 별이 무슨 별인지 짐작할수 없기에 항상 은하수를 중심으로 이편의 몇재별은 무슨별이고 저편의 몇재별은 무슨별이란 말슴을 하섰다. 그런데 그때도 신기하게 들은 것은 남강으로 가루질려 있는 은하수가 유월 유두절을 지나면 차츰차츰 머리를 돌려서 팔월 추석을 지나고 나면 완전히 동서로 위치를 바꾸는 것이였다.

이때가 되면 어느 사이에 들에는 오곡이 익고 동리집 지붕마다, 고지박이 드렁드렁 굴거가는 사이로 늦게 핀 박꽃이 한결 더 히게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러면 우리들은 오언고풍을 짓든 것을 파접을 한다고 왼동리가모혀서 잔치를 하며 야단법석을 하는 것이였다. 그래서 칠월 칠석에는 견우성과 직녀성이 일년에 한번 만나는 날인데 은하수가 가루막혀서 만날수가 없기에 옥황상제가 인간세상에 있는 가마귀와 까치를 불러서 다리를 놓게 하는 것이며 그래서 만나는 견우직녀는 서루 붓잡고 가진 소회를 다하기도 전에 첫닭소리를 들으면 울고잡은 소매를 놓고 갈려서야만 한다는 것 까마귀와 까치들은 다리를 놓기 위하야 돌을 이고 은하수를 올러갔기에 칠석을 지나고나면 모다 머리가 빨갓케버서진다는 것 이러한 얘기를 듣는 것은 잊혀지지안는 자미였었다. 그래서 나는 어린 마음에도 지상에는 낙동강이 제일 좋은 강이였고 창공에는 아름다운 은하수가 있거니하면 형상할 수 없는 한 개의 자랑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숲사이로 무수한 유성같이 흘러다니든 그 고흔 반딧불이 차츰 없어질때에 가을벌레의 찬소리가 뜰로 하나 가득차고 우리의 일과도 달러지는 것이였다. 여태까지 읽든 외집을 덮어치우고 등잔불밑헤서 또다시 경서를 읽기 시작하는 것이였고 그 경서는 읽는대로 연송을 해야만 시월 중순부터 매월 초하루 보름으로 있는 講을 낙제치 안는 것이였다. 그런데 이 강이란 것도 벌서 경서를 읽는 처지면 중용이나 대학이면 단권책이니까 그다지 힘드지 않으나마 논어나 맹자나 시전 서전을 읽는 선비라면 어느 권에 무슨 장이 날는지 모르니까, 전질을 다 외우지 않으면 안됨으로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였다. 그래서 십여세 남즛했을 때 이런 고역을 하느라고 장장추석에 책과 씨름을 하고 밤이 한시나 넘게되야 영창을 열고 보면 하늘에는 무서리가 나리고 삼태성이 은하수를 막 건너선때 먼데 닭 우는 소리가 어즈러히 들이곤 했다. 이렇게 나의 소년시절에 정드린 그 은하수였마는 오늘날 내 슲음만이 엇되히 장성하는 동안에 나는 그만 그 사랑하는 나의 은하수를 일허바렸다. 딴이야 내일허바린게 어찌 은하수 뿐이리요 東敗於楚하고 西敗於齊하고 西喪地於秦七百里를 할 처지는 본래에 아니였든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고나 할가? 그러나 영원한 내 마음의 녹야! 이것만은 어데로 찾을수가 없는 것같고 누구에게도 말할 곳조차 없다 그래서 요즘은 때때로 고요해 잠못이루는 밤 호을로 허른 성엽우를 걸으면서 말게 개인날이면 혹 은하수를 처다보기도 하고 그 은하수를 중심으로 한 성좌의 명칭이라든지 그 별 한 개한개에 대한 전설들을 동년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지나간 날을 회상해보나 그다지 선명치는 못한 것이며 오늘날 내 자신 아무런 성취한바 없으나 옛날 어룬들의 너무나 엄한 교육방법예도 천문에 대한 초보의 기초지식이라든지 그나마 별의 전설같은 것으로서 정서방면을 매우 소중히 역이신 것을 생각하면 나의 동년은 너무나 행복스러웠든 만큼 지금의 나의 은하수는 왕발(王勃)의 슬왕각시(膝王閣詩)의 일련인 {특환성이도기추(特換星移度幾秋)}오 하는 명문으로도 넉넉히는 해설되지 안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누가 있어 나를 고이하다하리요.(了)

<농업조선> 1940. 10.
전조기
누구나 버릇이란 쉽사리 고쳐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흔히 다른 사람의 한 가지 버릇을 새로이 발견했을 때는 아--- 저 사람은 저런 버릇이 있구나 하고 속으로 비웃어 보거나 그 버릇이 좋지 못한 종류의 것이면 대개는 업신여기는 수도 있는가 봐!그렇지만 나에게는 아무리 고쳐 보려도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란 손톱을 깎고 줄로 으르고 수건을 닦고 하는 것이다. 그것도 때와 곳을 가릴 것도 없이 욕조(浴槽)나 다방이나는 말할 것도 없고 기차나 배를 타고 멀리 여행이라도 하면 심심풀이도 되고 봄날 도서관 같은 데서 서너 시간 앉아 배기면 제아무리 게으름뱅이는 아닐지라도 윗눈썹이 기전기(起電機)처럼 아랫 눈썹을 끌어당길 때도 있는 것이고, 그럴 때에 손톱을 자르고 줄로 살살 으르면 자릿자릿한 재미에 온몸의 게으름이 다 풀리는 것이다. 그야 내 나이 어릴 때는 아침 일찍이 손톱을 자르면 어른들이 보시고 질색을 하시며 말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말릴 때에 누구인지 지금 기억되지는 않아도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손이 말하기를 아침에 손톱 깎고 밤에 머리 빗는 것은 몸에 해롭다고 하는 것이었고, 내 생각에도 그런 방문은 <동의보감(東醫寶鑑)>에라도 씌어 있는 줄 알았기에 그 뒤로는 힘써 시간이 한나절 지난 뒤 손톱을 닦고 하였지만, 나도 나대로 세상맛을 보게 된 뒤로는 쓴맛 단맛 다 보고 시고 떫은 구석과 후추, 고추 같은 광경에 부대낄 때가 시작이 되고는 손톱 치레를 할 만한 여가도 없었고, 어느 사이에 손톱은 제대로 자라 긴 놈, 짧은놈, 삐뚫어진 놈, 꼬부라진 놈, 벌떡 자빠진 놈, 앙당 아스러진 놈, 이렇게 되어 내 손이란 그꼴이 마치 오징어를 뒤집어 삶아 놓은 것같이 되었다.

그럴 때에 나는 또다시 손톱을 자를 것은 자르고 으를 것은 으르곤 하였으며 이른 아침이라도 가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밤으로 머리를 깎아 보아도 몸에 해로운 것도 없으니깐 아침에 손톱을 깎는 것조차 위생과는 관계 없는 것을 안 까닭이다.
그런데 내가 이 손톱을 자르는 버릇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도 벌써 20년이 더 지났다. 내가 난 지 백 일이나 되었겠지, 저고리 밖에 빨간 내 손이 나와서 내 얼굴을 후벼 뜯고는 나는 자지러질 듯이 울었다. 어머니가 놀라서 가위로 내 손톱을 잘라 주신 것이 처음이고, 그것이 늘 거듭하여지는 동안에 봄철이 오면 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차례로 불러 뒷마루 양지 쪽에 앉히고 손톱을 잘라 주시고 머리도 빗기고 귀도 후벼 주셨으며, 이것도 내 나이 여섯 살 때 소학을 배우고는 이런 일의 한 반(半)은 할아버님께 이관(移管)이 되었다. 옛날 내 고장 우리 집에는 그다지 크지는 못해도 허무히 작지 않은 화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 화단은 이때쯤 되면 일이 바빴다. 깍지로 긁고 호미로 매고 씨가시를 뿌리고 총생이를 옮겨 심고 적당한 거름도 주었다.

요즘같이 시클라멘이나 카네이션이나 튤립 같은 것은 없어도 옥매화, 분홍 매화, 홍도, 벽도, 해당화, 장미화, 촉규화, 백일홍, 등등 빛도 보고 향내도 맡고 꽃도 보고 잎도 볼, 말하자면 일년을 다 즐길 수가 있는 것이었는데, 내 할아버지 생각은 이제 헤아려 보면 우리들에게 글읽고 글씨 쓰인 사이로 노력을 몸소 맛보이는 것도 되려니와 그것이 정서 교육도 될 겸 당신의 노래(老來)를 화려하게 꾸밀 수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들은 이다지도 가볍고 고운 노동이 끝나면 할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손을 씻을 것과 손톱에 끼인 흙을 끌어내도록 손톱을 닦으라 하셨다. 이러던 내 손톱이기에 나는 손톱을 소중히 하고 자르고 으르고 닦고 하는 동안에 한 가지 방편을 얻었다. 그것은 나에게 거북한 일을 말하는 사람 앞에서 손톱을 닦는 것이다. 빤히 얼굴을 맞대이고 배알에 거슬리거나 듣기 싫은 말을 듣고 억지로 참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언짢은 표정을 할 수도 없어 손톱을 닦노라면 시골 계신 어머니도 그려 보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우러러 뵈일 수도 있다. 내 고향의 푸른 하늘 아래에도 봄이 왔을 것도 같으니.
질투의 반군성
형! 부탁하신 원고는 이제 겨우 붓을 들게 되어 편집의 기일에 다행히 맞아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늦게라도 이 붓을 드는 나에게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이유가 있는 것이며, 그 이유를 말하는 데서 이 적은 글이 가져야 할 골자가 밝혀질까 합니다.
그 첫째는 형의 몇 차례나 하신 간곡한 부탁에 갚아지려는 나의 미충(微衷)이며, 둘째는 형의 부탁에 갚아질만한 재료가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나는 생활을 갖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신세리티'가 없는 곳에는 참다운 생활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현금의 나에게 어찌 보고할 만한 재료가 있으리까? 만약 이 말을 믿지 못하신다면, 나는 여기에 재미스런 한 가지 사실을 들어 이상의 말을 증명할까 합니다.

그것은 지나간 7월입니다. 나는 매우 쇠약해진 몸을 나의 시골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동해 송도원(松濤園)으로 요양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 후 날이 거듭하는 동안 나는 그대로 서울이 그립고 서울 일이 알고 싶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서울 있는 동무들이 보내 주는 편지는 그야말로 내 건강을 도울 만큼 내 마음을 유쾌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전(그것은 형이 나에게 원고를 부탁하시던 날) 어느 친우를 방문하고 오는 길에 어느 책사(冊肆)에 들렀다가 때마침<조선 문인 서간집>이란 신간서가 놓였기에 그 내용을 펼쳐 보았더니, 그 속에는 내가 여름 동안 해수욕장에서 받은 편지 중에 가장 주의했던 편지 한 장이 전문 그대로 발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의 주인공은 내가 해변으로 가기 전 꼭 나와는 일거 인동을 같이한 룸펜(이것은 시인의 명예를 손상치 않습니다) 이던 나의 친애하는 이병각(李秉珏)군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나의 생활을 누구보다도 이해하는 정도가 깊었으리라는 것은 다시 말할 여지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형의 말에 의하면 급한 볼일이 있어 갔다고 하더라도 여름에 해변에 용무가 생긴다는 것부터 형은 우리 따위가 아니란 것을 새삼스레 알았습니다......"
운운하고 평소부터 나에게 입버릇같이 자네는 너무 뻐기니까 하던 예의 독설을 한참 늘어놓은 다음 그는 또 문장을 계속하였습니다.
"....... 건강이야 묻는 것이 어리석지요. 적동색(赤銅色)얼굴에 '포리타민' 광고에 그린 그림 쪽......"이 되라느리 하여 놓고는 ".......한 채 집이 다 타도 빈대 죽는 맛은 있더라고, 장림(長霖)이 자리하니 형의 해수욕 풍경이 만화의 소재밖에는 되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고소합니다........." 고 끝을 맺은 간단한 문장이었습니다.
풍자시를 쓰는 우리 이 군의 나에 대한, 또는 나의 생활에 대한 견해가 그 역설에 있어서 정당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 군에게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은 기왕 벌인 춤이면 왜 좀더 풍자하지 못하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대저 위에서도 한 말이나 '뻐긴다'는 말은 사실이 없는 것을 허장 성세(虛張聲勢)한다는 말일 것인데, 허장 성세하는 사람에게 '신세리티'가 있겠습니까. 또 무슨 생활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생활이 없다'는 순간이 오래 오래 연속되는 동안 그것이 생활이라면 그것을 구태여 부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이 긍정하는 바를 내가 긍정해서 남의 위치를 침범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부정할 바를 부정한다는 것은 마치 남이 향락할 바를 내가 향락해서 충돌이 생기고 질투가 생기는 것보다는 다른 어떤 사람도 분배를 요구치 않는 고민을 나 혼자 무한히 고민한다는 것과 같이 적어도 오늘의 나에게는 그보다 더 큰 향락이 없을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마치 이 길은 내가 경험한 가장 짧은 한 순간과도 같을는지 모릅니다. 태풍이 몹시 불던 날 밤, 온 시가는 창세기의 첫날밤같이 암흑에 흔들리고 폭우가 화살같이 퍼붓는 들판을 걸어 바닷가로 뛰어 나갔습니다. 가서 덩굴에 엎어지락 자빠지락, 문학의 길도 그럴는지는 모르지마는 손에 든 전등도 내 양심과 같이 겨우 내 발끝밖에는 못비치더군요.
그러나 바닷가에 거의 닿았을 때는 파도 소리는 반군(叛軍)의 성이 무너지는 듯하고, 하얀 포말(泡沫)에 번개가 푸르게 비칠 때만은 영롱하게 빛나는 바다의 일면! 나는 아직도 꿈이 아닌 그날 밤의 바닷가로 태풍의 속을 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창공에 그리는 마음
陸士

벌서 데파-트의 쇼윈드는 홍엽(紅葉)으로 장식(裝飾)되엿다. 철도안내계(鐵道案內係)가 금강산(金剛山) 소요산(逍遙山)등등 탐승객(探勝客)들에게 특별할인(特別割引)으로 가을의 써비쓰를 한다고들 떠드니 돌미력갓치 둔감(鈍感)인 나에게도 엇지면 가을인가? 십흔생각도 난다.

외국(外國)의 지배(支配)를 주사(注射)침 끝처럼 날카롭게 감수(感受)하는 선량(善良)한 행운아(幸運兒)들이 감벽(紺碧)의 창공(蒼空)을 치여다볼때 그들은 매연(煤煙)에 잠긴 도시(都市)가 실타기보다 갑싼 향락(享樂)에 지친 권태(倦怠)의 위치(位置)를 밧구기위하야는 제비색기갓치 경쾌(輕快)한 장속(裝束)에 제각기 시골의 순박한 처녀(處女)들을 머리속에 그리며 항구(港口)를 떠나는 갑판(甲板)우의 젊은 마도로스들과도 갓치 분주히들 시골로, 시골로 떠나고 만다 그래서 도시(都市)의 창공(蒼空)은 나와갓치 올데갈데업시 밤낫으로 인크칠이나 하고잇는 사람들에게 맷겨진 사유재산(私有財産)인것도 갓다.

그래서 나는 이 천재일시(千載一時)로 엇은 기회(機會)를 놋치지안켓다고 나의 기나긴 생활(生活)의 고뇌(苦惱)속에서 실(實)로 쩔븐 일순간(一瞬間)을 칠수(七首)의 섬광(閃光)처럼 맑고 깨긋이 개인 창공(蒼空)에 나의 마음을 그리나니 일망무제(一望無際)! 오즉 공(空)이며 허(虛)! 이것은 우주(宇宙)의 첫날인듯도하며 나의 생(生)의 요람(搖籃)인것도 갓허라.

신(神)은 아무것도 업는 공(空)과 허(虛)에서 우주만물(宇宙萬物)을 창조(創造)하엿다고 그리고 자기의 뜻대로 만들엇다고 사람들은 말하거니 나도 이 공(空)과 허(虛)에서 나의 세계(世界)를 나의 의사(意思)대로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것처럼 손쉽게 창조(創造)한들 엇덜랴 그래서 이 지상(地上)의 모든 용납(容納)될수 업는 존재(存在)를 그곳에 그려본다해도 그것은 나의 자유(自由)이여라.

그러나 나는 사람이여니 일하는 사람이여니 한사람을 그리나 억천만(億千萬)사람을 그려도 그것은 모다 일하는 사람 뿐이여라 집속에서도 일을 하고 벌판에서도 일을 하고 산(山)에서도 일을 하고 바다에서도 일을 하나 그것은 창공(蒼空)을 그리는 나의 마음에 수고로움이 업는것처럼 그들의 하는일은 수고로움이 업서라 그리고 유쾌(愉快)만 잇나니 그것은 생활(生活)의 원리(原理)와 양식(樣式)에 갈등(葛藤)이 업거늘 나의 현실(現實)은 엇지 이다지도 착종(錯綜)이 심(甚)한고? 마음은 창공(蒼空)을 그리면서 몸은 대지(大地)를 움겨듸더 보지 못하는가?

가을은 반성(反省)이 계절(季節)이라고하니 창공(蒼空)을 그리는 마음아 대지(大地)를 돌아가자 그래서 토지(土地)의 견문(見聞)을 창공(蒼空)에 그려보듯이 다시 대지(大地)에 너의 마음을 마음대로 그려보자.<신조선> 1934.10.
청란몽
거리에 마로니에가 활짝 피기는 아직도 한참 있어야 할 것 같다. 젖구름 사이로 기다란 한 줄 빛깔이 흘러 내려온 것은 마치 바이올린의 한 줄같이 부드럽고도 날카롭게 내 심금(心琴)의 어느 한 줄에라도 닿기만 하면 그만 곧 신묘(神妙)한 멜로디가 흘러 나올 것만 같다.

정녕 봄이 온 것이다.

이 가벼운 게으름을 어째서 꼭 이겨야만 될 턱이 있으냐.

대웅성좌(大熊星座)가 보이는 내 침대는 바다 속보다도 고요할 수 있는 것이 남모르는 자랑이었다. 나는 여기서부터 표류기(漂流記)를 쓸 수도 있는 것이다. 날씬한 놈, 몽땅한 놈, 나는 놈, 기는 놈, 달리는 놈, 수없이 많은 어족(漁族)들의 세상을 찾았는가 하면 어느때는 불에 타는 열사(熱砂)의 나라 철수화(鐵樹花)나 선인장들이 가시성같이 무성한 위에 황금 사북같이 재겨 붙인 작은 꽃들, 그것은 죽음에의 유혹같이 사람의 영혼을 할퀴곤 하였다.

소낙비가 지나가고 무지개가 서는 곳엔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계류(溪流)를 따라 올라가면 자운영꽃이 들로 하나 다복이 핀 두렁길로 하늘에 닿을 듯한 전나무 숲 사이로 들어가면 살림맥이들은 잇풀을 뜯어먹다간 벗말을 불러 소리치곤 뛰어가는 곳, 하이얀 목책이 죽 둘린 너머로 수정궁같이 깨끗한 집들이 즐비한 곳에 화강암으로 깎아 박은 돌계단이 기다랗게 하양(夏陽)의 옅은 햇살을 받아 진주 가루라도 흩뿌리는 듯 눈이 부시다.

마치 어느 나라의 왕궁인 듯 호화스럽다. 그렇다면 왕은 수렵이라도 가고 궁전만은 비어 있는 것일까 하고 돌축을 하나하나 밟아 가면 또다시 기다란 줄 행랑(行廊)이 축을 하나하나 밟아 가면 또다시 기다란 줄 행랑(行廊)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오른편으로 돌아들어 왼편으로 보이는 별실(別室)은 서재인 듯 조용한 목에 뜰 앞에 조롱들 속에서 빛깔 다른 새들이 시스마금 낯선 손님을 맞아 아는 체하고 재재거린다. 그 아래로 화단에는 저마다 다른 제 고향의 향기를 뽑아 멀리서 온 에트랑제는 취하면 혼혼하게 잠이 들 수도 있는 것이다.

가벼운 바람과 함께 앞창이 슬쩍 열리고는 공주보다 교만해 보이는 젊은 여자 손에는 새파란 줄기에 양호필(羊毫筆)같이 하얀 봉오리가 달린 난화(蘭花)를 한 다발 안고 와서는 뒤를 돌아보며 시비(侍婢)를 물리치곤 내 책상 위에 은으로 만든 화병에다 한 대를 골라 꽂아 두곤 무슨 말을 할 듯 하다가는 그만 부끄러운 듯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조심조심 물러가고 만 것이었다. 달빛이 창백하게 흐르면 유리창을 넘어서 내 방은 추워졌다. 병든 마음이었고 피곤한 몸이었다. 십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나는 모든 것을 내 혼자 병들어 본다. 병도 나에게는 한 개의 향락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는 무덤 같은 방안에서 혼자서 꿈을 꿀수가 있지 않은가. 잠이 깨면 또 달이 밝지 않은가. 그 꿈만은 아니었다. 그 여자가 화병에 꽂아 주고 간 난꽃이 그냥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복욱하고 청렬한 향기가 몇천만 개의 단어보다도 더 힘차게 더 따사롭게 내 영혼에 속삭이는 말 아닌 말이 보다 더 큰, 더 행복된 위안이 어디 있으므로 이것을 꿈이라 헛되다고 누가 말하리요. 진정 헛된 꿈이라고 말하면 꿈 그대로 살아보는 것도 또한 쾌하지 않은가.

나는 때로 거리를 걸어 보기도 하나 그 꿈속에 걸어 본 거리와 그 여자의 모습은 영영 볼수는 없는 것이었다. 때로 꽃집을 들러도 보고 난꽃을 찾아도 보았으나 내 머리 속에 태워 붙인 그것처럼 사라질 줄 모르는 향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꿈은 유쾌한 것, 영원한 것이기도 하다.
횡액
약속하지마는 불유쾌한 결과가 누구나 그 신변에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이것을 횡액(橫厄)이라고 하여 될 수만 있으면 이것을 피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이 보통이지마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이러한 횡액의 연속연을 저도 모르게 방황하는 것이, 사실은 한평생의 역사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배를 타다가 물에 빠져서 죽었는가 하면, 소나기를 피하여 빈집을 찾아 들었다가 압사(壓死)를 한 걸인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이 축들은 대개 사람에게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때는 무슨 수를 꾸며서라도 그 주위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제 존재를 살리려는 노력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꼭 알맞은 정도의 결과를 가져 온다면 여러 말 할 바 아니로되, 때로는 그 효과가 너무 미약하여 이렇다할 만큼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고, 어떤 땐 너무나 중대한 결과가 실로 횡액이 되고 말 때가 많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간편한 효용을 생각해 낸 것이 연전에 작고한 중국의 문호 노신(魯迅)이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던 전전 해 여름에 쓴 수필집에서 <병후 일기(炳後日記)>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 있다.

"...... 나는 지금 국가나 사회로부터 그다지 중요하게 보여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뿐만 아니라 친척, 친구들까지도 차츰차츰 사이가 멀어져 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요즘 나는 병으로 해서 이 사람들 주의를 갑자기 끌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병이란 것도 그다지 나쁜 것만은 아닌 듯도 하다. 그러나 기왕 병을 앓는다 하면 중병이나 급병은 대번에 생명에 관계가 되니 재미가 적어도 다병(多炳)이란 것은 세상의 모든 귀골들이 하는 것이니, 나 자신도 매우 포스라운 사람들 틈에 끼일 수가 있게 되나보다....."

이런한 노신 씨 말을 따른다면 병도 때로는 그 효용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나라는 사람은 실로 천대받을 만큼 건강한 몸이라 365일에 한 번도 누워 본 기록이 없으니 이러한 행복조차도 누릴 길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 하늘이 돌봄이었는지, 나는 마침내 뜻하지 않은 횡액에 걸려 들었다는 것은 어느 날 전차를 타고 종로로 돌어오는 길에 황금정(黃金町)에서 동대문(東大門)에 다다르자, 우리가 탄 전차보다 앞의 전차가 아직 떠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가 탄 전차도 속력을 줄이고 정차를 하려던 것이 앞의 차의 출발과 함께 새로운 속력으로 급한 커브를 도는 바람에 차 안의 사람들은 모두 일시 안정되었던 자세를 가눌 여지도 없이 몸을 흔들고 넘어가는 것이었고, 나는 아차 할 사이에 넘어지며 머리가 유리창에 닿으려는 순간, 바른손으로 막은 것만은 문자 그대로 민완(敏腕)이었으나, 그다음 내 팔목에는 전치(全治) 2주일의 열상(裂傷)을 내었고, 유리창은 산산이 깨어졌다.

내 지금도 그 사람의 직함을 알 바 없으나, 차장 감독이라고 부를 듯한 장신 거구(長身巨軀)의 40쯤 되어 보이는 헬멧을 쓴 사람이 나에게 와서 친절 정녕히 미안케 되었다는 인사말을 하고, 운전수와 차장의 번호를 적은 뒤에 먼저 사고의 전말을 보고한 다음, 나를 의무실이라는 데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내 마음으로는 종로로 빨리 와서 친한 의원을 찾아 신세를 질까 했으나, 이 사람의 친절을 무시하기도 거북해서 따라가는 것이었지마는, 사람들이 오해를 하려면 혹 전차표라도 속이려다가 감독에게 발로라도 되어 붙잡혀 가는 것이나 아닌가고 하면 사태는 자못 난처한 것이었다.

그래 우선 의무실이란 곳을 들어서니 간호양(看護孃)이 황망히 피투성이 된 내 손을 옥시풀로 깨끗이 닦은 뒤에 닥터 씨가 매우 냉정한 태도로 핀세트를 잡고 나타났다.그러고는 가위 소리와 내 살이 베어지는 싸각싸각하는 소리가 위품좋게 돌아가는 전선(電扇) 소리와 함께 분명히 내 귀에 돌려 왔다.

붕대를 하얗게 감고 비로소 너무도 조잡한 의무실이고나 하고 생각하며 나오려 할 때, 직업과 성명을 묻기에 그것은 알아 무엇하느냐고 했더니 규칙이라기에 써주고 말았다.

그래도 또 전차를 타야 했다. 전차 속은 여전히 덥고 복잡하건마는, 싸각싸각하는 살 베어지는 소리는 좀처럼 귓가에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올해 봄이었다. K란 동무가 맹장염으로 수술을 했다기에 문병을 갔더니, 제 귀로 제 창자를 싸각싸각 끊는 소리를 들었다고 신기해서 이야기하던 생각을 하고, 자위(自慰)를 해보아도 기분이 그다지 명랑해지지 않기에, 다시 붕대 감은 내 팔목을 들여다보고 아픈 정도를 헤아려 보아도 중병도 급병도 다병(多炳)도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R이란 동무와 한강 쪽에 나가서 배라도 타고 화풀이를 할까 하고 가던 도중, R군의 말이 "자네 팔목 수술을 했으니 낫겠지마는 양복 소매는 어쩔 텐가" 하기에 벗어 보았더니, 연전(年前)보다 배액이나 들여 만든 새 옷이 영원히 고치지 못할 흠집을 내고 말았다. 세상에 전화위복(轉禍爲福)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건마는, 나의 횡액은 무엇으로 보충할 수 있을까? 이것을 적어 D형의 우의(友誼)에 갚을밖에 없는가 한다.
문외한의 수첩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 친한 동무였다. 그러므로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결코 무슨 비밀이란 것은 있을 터수가 아니였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교우록 속에 씌여져 있는 그의 ‘호패(號牌)’에 붉은 줄을 그은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였다.
이러한 간단한 사실이 모르는 사람으로 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 않을지 모르겠으나 남달리 상처(相處)해오든 벗을 한 사람 잃어버린 나의 호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 수 없이 서러운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글을 쓰려는 오늘 아침에 이제는 고인인 R의 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 편지 한 장과 「문외한(門外漢)의 수첩(手帖)」이란 유고 한 권이 보내여 왔다.
그 유고는 이래 10년에 쓴 고인의 일기인 모양인데 그도 출일(逐日)해서 쓴 것도 아니고 때때로 마음이 내킬 때마다 써둔 것이며 그 맨 끝 페―지에 “○○형(兄)에게”라는 이 세상 사람으로서의 절필인 듯한 글씨가 묵흔(墨痕)이 임리(淋漓)한 것은 소리 없는 내 눈물을 더욱 짜내는 것이였다. 그리고 이 글 내용은 일기는 일기면서도 대부분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였다. 그 편지 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 있게 생각나는 부분만을 써서보기로 한다면 그도 처음에는 문학청년이였든 사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하고저 한 문학을 끝끝내 완성할 수 있는 행복된 사람은 아니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죽든 날까지도 문학을 단념하지는 않었다는 것은 어느 해 겨울 그와 나는 우연히도 어느 온천에서 만났다. 그때는 바로 동경에서들 풍자문학록이 한참 대두할 때이였으므로 그도 또한 예에 빠지지 않고 이것의 조선에 있어서 가능하다는 설교를 하는 것이였다. 그때 좀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한 나의 말에 그는 말하기를 조선사람은 생활 그 자체가 풍자적으로 되여 있다고 떠들어대기에 나는 그에게 더 진지한 태도로 사물을 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였고 그 다음날 우리는 서로 갈린 채 영원히 보지 못할 사람이 되였다.
이 글은 그때 나와 갈려서 며칠 동안에 쓴 것이라고 생각난다.

一九三 ×年 ×月 ×日
―○형(兄)! S역에서 형과 갈려서 나는 ○동까지 50리나 되는 산길을 걸어왔소. 동리 거리에 피곤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 집 초당방을 찾어 들어가면 이 밤을 뜨뜻한 아랫목에서 지낼 수도 있겠거니와 그들과 함께 살을 맛대이고 지나며 그들의 생활을 체득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유쾌한 일이겠습니까?
나는 여기서 형이 일찍이 하든 말을 생각해 보았소. 상해 어데선가? 목욕을 갔을 때 불란서 사람과 서반아 사람과 같은 욕조에 들어갔을 때의 감정을 얘기한 것을 기억이나 하시는지요. 그때는 적나라한 몸둥이들이 모두 꼭같은 온도를 느낄 수 있더라고 세계는 모름지기 목간통같이 되어야 한다고.그러나 오늘의 나의 심경은 그와는 정반대로 어데까지나 육친애를 느껴볼 결심이였소. 그래서 세계는 차라리 초당방같이 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았소. 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 다른 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나오는 동안에 나는 가졌든 담배를 모조리 다 피워 바렸소. 담배라도 피우지 않으면 첫겨울의 눈우바람이 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끝이 저리기도 해서 담배도 살 겸 주막집 있는 데로 가까이 찾어갔소. 그곳에는 마침 담배 가게가 있고 젊은 농부인 듯한 사람이 있기에 오전짜리 한 푼을 던지고 ‘마코’ 한 갑을 달라고 하였더니만 나는 여기서 뜻하지 못한 실패를 하였소. 그것은 내 행동이 몸차림과 어울리지 않은 데가 있었든지 또는 언어에 무의식적인 불손이 있었든지 그 젊은 농부는 내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 “문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져가오”……하며 코웃음을 픽 하며 ‘마코’ 한 갑을 내 앞으로 툭 던지는 것이였소.
나는 처음 이 농부의 말을 듣고 한참동안 어름어름하였소. 그것은 담배 가게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도회에서 보는 담배 가게와 같이 백색 ‘타일’타로 대를 싸올리고 ‘네온’등을 달고 유리창을 단 것이 아니고 처마 끝에다 석유 궤로 목판을 짜서 장수연, 희연, ‘마코’, 단풍 이런 것들을 몇 갑씩 넣어둔 것이였소. 그래 내가 들어갈 문이란 어데 있겠소.
그날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장날이였나 부오. 장꾼들이 들신들신하고 그 집으로 들어오기에 나는 그만 그곳을 떠나 돌아나오랴니까 바로 내 머리 뒤에서 “건방진 녀석, 눈에 유리 창을 붙이고”……하면서 별러대는 것이였소. 그때 나는 모든 것을 다 알었소.
시골 산촌에선 유리라는 것은 들창에나 붙이는 것인데 네 눈에 붙인 등창을 열고 다시 말하면 문안에 들어와서 (안경을 벗고) 담배를 가져가란 말였소.
내가 안경을 쓰게 된 것은 시력이 부족한 탓이였고 그 젊은 농부가 내 안경 쓴 것을 못마땅히 여기는 것은 고루한 인습의 소치라고 하드래도 그 표현방법이 얼마나 내 뼈를 저리도록 쑤시는 풍자이였겠소. 과연 여기에 남과 나라는 투명한 장벽이 서서 있다는 것을 나는 안 듯하였소.
그리고 내 발길은 무겁게 옮겨졌소. 아주 몇 해를 두고 어느 사막이라도 걸어온 듯한 피로를 깨달았소. 하늘은 점점 어두워오고 눈조차 함박으로 퍼붓는 듯하였으나 나는 다시 옷깃을 단속지는 않었소. 될 수 있으면 차디찬 눈보라가 내 보드러운 목덜미살을 여미듯이 얼어붙으라고 하여 본 것은 일종의 자기잔학일른지도 모르겠소.
두 시간이나 지났을까. 나는 과연 어느 집 초당방에 손이 되였소. 방안에는 초말 냄새가 코를 찌를망정 모이는 사람은 대략 6, 7명이나 되었고, 연령은 최저 십팔로 최고 삼십이, 인품은 모두 순후하고 황소같이 질박한 놈도 있으며 암사슴같이 외로운 연석도 있었소. 그날 밤은 내라는 존재가 그들로 보면 낫설은 손이여서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주의는 하면서도 조금도 악의는 갖지 않었든 모양이였소. 그러기에 나더러 세상의 자미 있는 얘기를 들려달라는 것이오.
이때 나는 어떠한 얘기를 들려줄까 하고 망설이는 판에 그들 중에도 연령과 지식의 정도가 있어서 삼십에 가까운 사람들은 『화용도(華容道)』를 들려 달라하고 그중 한사람은 『춘향전』을 얘기하라 하였소마는 여기도 또한 의견은 일치되지 않었소. 그 중에도 제일 얼굴이 말쑥하고 나이가 이십오 세쯤 되여 보이는 농부 한 사람 말을 들으면 보통학교를 중도퇴학은 하였어도 그들 가운데서는 식자연하고 내로라는 듯이 뽐내면서 ‘서양’ 얘기를 무에나 들리라는 것이오. 그래서 결국은 ‘춘향전’파와 ‘서양’파가 절충한 결과 나는 이 진귀한 ‘서양춘향전’을 친절하게도 강좌를 담임(擔任)하게 되였으며 그는 득의만면하야 내 담배갑에서 ‘마코’ 한 개를 빼여 물고 인조견 옥색관사 홑조끼에서 성냥을 꺼내여 담배를 피우는 것이였소. 이 방에서는 모두들 이 사람을 ‘하이카라상’이라고 부르는데 그 ‘상’자가 나에게는 조금 귀익지 못하나 아마 이것을 도시말로 번역하면 ‘모―던뽀이’란 말도 같소.
그러나 이 ‘서양춘향전’이란 진본서는 가난한 나의 문헌학 지식으로는 도저히 알어낼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그들에게 ‘린드뻑’이 대서양을 어떻게 횡단하였다든지 ‘크레오파트라’의 국적이 어느 나라냐고 설왕설래를 하여보았자 ‘하이카라상’이라는 이 방의 “쏘크라테쓰”도 그까지는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 같았소.
그래서 나는 생각다 못해 ‘쉑스피어’의 『로미오와 주리엣트』를 얘기하기로 하고 위선 그 주인공의 이름을 그들이 알어듣기 쉽게 ‘노미’이와 ‘준’이가 이렇게 얘기를 하니 그래도 모두 그것이 자미가 있었든지 ‘준’이가 추방당튼 날 새벽에 ‘노미’를 찾아가 이별을 하는 판인데 이곳에야 ‘나이팅겔’이 울 수가 있을 리도 없겠고 생각다 못해 속담에 꿩값에 닭이라니 닭을 울리고 ‘준’이를 떠나보냈구려! 그래도 이때는 모두들 감탄해서 흥흥 콧소리를 치며 신 삼고 가마니 치든 손을 쉬이는구려!
밤은 벌써 오전 두 시나 되였는데 바깥에서는 눈보래가 쉬지 않고 나렷소. 사람들은 차차 긴하품을 하다가는 제대로 팔을 베고 자는 이도 있고 또 그 자는 이의 다리를 베고 자는 사람도 있으며 나중에는 ‘하이카라상’과 나만이 남어서 나는 이 동리의 서러운 전설을 듣는 것이오. 옛날에 이 동리와 건너마을이 편을 갈러서 정초(正初)이면 ‘줄댕기’가 시작되였고 그때는 사람들이 수―백명씩 모여서 그중에도 젊은 사람들은 처녀나 총각이 제각기 마음 있는 사람들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영원히 그 자손들은 변함없이 이 동리를 지켜 왔건마는, 지금은 어쩐 일인지 그 사람들은 누가 오란 말도 없고 가란 말도 없건만은 다들 어데인지 한 집씩 두 집씩 동리를 떠나고 그럴 때마다 젊은이들의 싹트기 시작한 사랑은 그 봄이 다가기도 전에 덧없이 흘러가고 만다는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야 이 사람은 창졸간에 미친 듯이 쓰러져 흑흑 느껴가며 우는 것이였소. 나는 이것을 왜 우느냐 물어볼 힘도 없고 울지 말라고 위안을 줄 수도 없었으며 다만 나 혼자 생각기를 너도 또한 불쌍한 미완성 초연의 순정자로구나 하고 동정을 살피노라니 이 사람도 그냥 잠이 들고 먼데 닭이 잦은 홰치는 소리가 들리며 눈은 끄쳤는지 바깥은 바람이 몹시 불었소.
나는 몇 시간 남지 않은 이 밤을 도저히 잘 수는 없었소. 내 머리는 해저(海底)와같이 아득하고 내 가슴은 운모(雲母)와같이 무거웠소. 돌아누울래야 돌아누울 수도 없으려니와 옆에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는 검은 시체를 실은 마차의 수레바퀴를 갈고 가는 듯하오. 그럴수록 방안의 정적은 무거워져서 자꾸만 지구의 중심으로 침전되는 듯하였소. 나는 참다못하야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웠소. 바로 그때였소. 누구인지 내 머리맡에서 말하는 사람이 있었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할 수 없으나 혹은 저녁 전에 담배 가게에서 본 농부일른지도 모르겠소. 그가 나에게 한 말은 분명코 “문안에 들어와서……”였소. 나는 여기서 눈을 번쩍 뜨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소.
‘오! 그렇다. 나는 문외한(門外漢)이다.’ 아무리 하여도 인생의 문(門)안에 들어서지 못할 나이라면 차라리 영원한 문외한으로 이 세상을 수박 겉 핥듯이 지나갈 일이지 그 좁은 문을 들어가려고 애를 쓸 필요가 어데 있겠소. 문밖에서 살어가면 책임과 부담도 가벼우려니와 그 문안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보물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문안에서 지킬 때에 나 혼자만 문밖에서 그 모든 것을 파수 본다면 그것도 나의 한 가지 임무가 아니겠소. 그렇다면 나는 달게
인생(人生)의 문외한(門外漢)이 되겠소.
그래서 남들이 모두 문(門)안에서 보는 세상을 나는 문(門)밖에서 보겠소. 남들은 깊이 보는 세상을 나는 널리 보면 또 그만한 자긍이 있을 것 같소. 오늘은 고기압이 어데 있는지 풍속은 64미리오. 이 동리를 떠나 아무도 발을 대지 않은 대설원을 걸어 가겠소. 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을 가는 느낌이오. 누가 나를 따라 이 길을 올 사람이 있을는지? 없어도 나는 이 길을 영원히 가겠소.

×
나는 이까지 보고 위선 이 유고를 덮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한 사람이 인생의 문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영원히 걸어간 기록이다. 오! 그러면 나도 역시 문외한(門外漢)인가?

丁丑 七. 二九

『朝鮮日報』, 1937년8월 3~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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